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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자기(4): 우주 중심이 되는 자기

일차적 자기애와 우주적 자기

자기애는 자기-사랑(self-love)이다


‘자기애’라는 단어는 나르시시즘으로 오해를 많이 받는다.

‘자기애’란, 글자 그대로 ‘자기사랑’(self-love)이다.

자기사랑이 충만하다면 매우 건강한 상태이다. 그런데 자기사랑이 채워지지 못할 때 ‘자기적’(narcissistic)이 된다.


‘적’자가 하나 붙음으로서 의미가 확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감정’과 ‘감정적’인 것, 전자는 감정이 풍부하다고 할 때 사용할 수 있지만, 감정을 잃어버렸을 때 ‘감정적’이 된다.

그런 의미의 차이는 ‘계산’과 ‘계산적’이라는 어휘의 차이에서도 발견된다.

계산 능력이 좋은 사람인 것과 계산적인 사람의 의미가 차이를 보면 그렇다.

자기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일차적 자기애가 잘 채워져서 넘치는 사랑으로 자기중심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자기애적인 사람은 자아 밖에 모르는 자아중심적인 사람이다.


자기는 일차적 자기애가 채워져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빈 잔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잔은 자기애로 채워지는 잔이다. 아기는 ‘나밖에 모르는 사랑’으로 채워져야 마땅하며 그래서 엄마와 가족들은 아기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아기는 젖을 빨면서 엄마의 사정을 봐 주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데에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이렇게 채워지는 사랑은 ‘일차적 자기애’라고 불린다.

아기는 이렇게 ‘빈잔’을 자기밖에 모르는 사랑으로 채우고 나면, 자기 존재의 중심을 확보하게 된다.

자기중심을 확보한다는 것은 세계의 중심이 되고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뒤에서 물리학적 서술로 증명될 것이다.


만일 일차적 자기애를 채우지 못해 자기중심을 가지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런 사람은 주체를 자신 안에 확보하지 못하고 주체가 주변 사람들에게 분산되어 있다.

그래서 늘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무슨 일을 해도 자기 확신이 없어 다른 사람의 확인을 받아야 한다.

그는 어디를 가나 자신만의 고유한 위치나 자리를 갖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자신의 자리와 위치가 정해지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안절부절못한다.

일단 일차적 자기애가 충분히 채워진 사람이라면, 한번 채워진 자기애는 영원히 고갈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남의 위한 사랑을 해도,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을 다 퍼주어도 존재의 밑바닥에 쉼 없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다시 채워진다.

그리하여 늘 넘치는 사랑을 주기 때문에 자기애가 고갈될 염려가 없다.

일차적 자기애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남을 위해 헌신하거나 희생적인 일을 하면 억울함과 짜증이 나온다.

왜냐하면 채워지지 않은 자기애를 끄집어내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타인을 위해 사용해야 하기에 사용하는 만큼 자신의 자기애는 고갈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를 고갈시켜가면서 자기애를 누군가에게 빼앗길 때 짜증이 나고 억울해지는 것이다.

엄마가 자녀에게 모성애를 발휘하고자 하나, 일차적 자기애가 부족한 엄마라면 자녀를 사랑해야 하는 줄 알면서 짜증이 나고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우주의 중심이 되는 자기



일차적 자기애를 채움으로써 자기중심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세계의 중심이 되고 우주의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항해 중인 배가 폭풍을 만나 더 이상 항로를 진행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항해를 멈추고 그 자리에 배를 세워 닻을 내린다.

그것은 배의 중심을 잡기 위함이다.

닻은 배의 중심을 잡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배가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닻이 어떤 중심을 향해야만 한다.

닻이 향하는 중심은 어디인가?

바로 지구의 중심이다.

닻이 중심을 잡고도 배는 계속 흔들린다.

배가 그렇게 흔들리는 이유는 배 자체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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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을 내린 배는 흔들리는 형태로 선체의 중심을 잡아가지만 동시에 그 배 지구의 중심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닻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흔들리는 것은 파선의 위험이 있어 언제 뒤집어 질지 모르는 것이지만, 닻을 내린 상태에서 흔들리는 것은 중심을 잡기 위해서 필요하다.

흔들리지 않으면 배 자체 중심을 잡을 수 없고, 그 중심은 닻을 통해 지구의 중심과 연결된다.

닻은 지구의 중심을 향하면서 동시에 태양계의 중심을 향하고, 은하계와 은하단의 중심, 우주의 중심을 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내가 자기의 중심을 잡는 것은 곧 우주의 중심을 잡는 것이며, 나의 중심을 확보한다는 것은 곧 내가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자기는 곧 우주의 자기가 된다.


모두 알다시피 지구 역시 계속 움직이고 있다.

지구가 공전과 자전하는 형태로 움직이는 이유는 옆에 있는 별들이 돌고 있기 때문에 지구도 더불어 도는 것이다.

지구가 그렇게 도는 이유는 바로 태양을 향해 중심을 잡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폭풍우를 만난 배에서 내린 닻은 배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지구의 중심으로 향함과 동시에 태양의 중심을 향한다.


태양은 태양계 안에서는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만 태양계 자체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엄청난 속도로 돈다.

태양계를 도는 것이 지구 외에도 많은 별들도 함께 돈다.

마찬가지로 북극성을 도는 별들 또한 태양계가 전부가 아닐 것이다.

북극성 또한 은하계의 중심을 향해 돌고 수많은 은하계는 은하단을 향해 돈다.

은하단은 또 다른 중심에 있는 무언가를 향해 돌 것이다.

이처럼 우주는 궁극적인 중심점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자신의 규칙 궤도를 돌거나 불규칙적인 궤도를 도는 모든 별들은 하나의 중심을 향해 돌고 있다.

그 별들은 그 중심을 잡으면서 자신의 변화무쌍하면서도 고유한 활동들을 한다.

우주 안에 있는 어떤 개체라고 일단 그 중심을 잡고 나면 자신만의 고유한 삶, 활동, 또는 정지(식물과 광물의 경우)를 하는 것이다.


우주 안에 이 중심점이 없다면, 우주는 불규칙적으로 제멋대로 움직이며 사방으로 흩어져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우주가 이처럼 질서 있게 운행되는 것은 바로 이 궁극적인 중심점 때문이며, 모든 존재, 모든 개체, 모든 별들이 그 중심을 향하는 목적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중심이 바로 자기(self) 이자,이다.


자기의 두 요소


이처럼 우주 안에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체들은 시간과 무관한 동일성(sameness, 중심)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시간 속에서 변화무쌍한 삶을 산다(자기성, selfhood).


이 두 가지(동일성과 자기성)는 자기(self)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이다.


나의 자기도 이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살아간다.

유아기에 '나는 있다'를 자각하면서 나의 동일성을 가진다.

동일성을 확보하면서, '나'는 유아기의 나, 아동기의 나, 청소년기의 나, 청년 장년으로서 나, 노년의 나는 항상 동일하다.

이 동일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정신적으로 분열이 된다.


이 동일성을 확보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시간의 흐름(성장) 안에서 자기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전개해 간다.


철학에서 다음과 같은 모순적 질문을 자주 한다.


정원에 사과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내가 어제 본 그 나무와 오늘 본 그 나무는 과연 동일한가?

이런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답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다.

또는 같다고 해야 하고, 다르다고 해야 한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이런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불변하는 요소(동일성)과 시간 속에서 늘 변화하는 요소(자기성)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존재를 표현하면 모순적 질문에서 쉽게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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