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과 지혜가 통합되는 십자가: 요셉-다니엘-바울
자기(self)는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그 다음날 그 나무는 같은 나무인가 어제와는 다른 나무인가?
답변은 두 가지가 모두 가능하다.
누가 봐도 어제의 나무는 오늘 그 나무와 동일하다.
또 누가 봐도 어제의 그 나무는 오늘의 그 나무가 아니다.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나는 어제의 나와 동일한 나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나의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은 이렇게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동일한 나를 나의 <동일성(sameness)>이라 부르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른 점을 나의 <자기성(selfhood)>라고 부른다.
동일성은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나는 동일하다는 것이지만, 자기성은 시간의 변화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는 self의 정체성을 언급하면서 이 두 가지를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사람은 나의 동일성을 확보한 후에는 자기 발달을 위해 자기성으로 계속 자기 전개를 해 나가야 한다.
자폐증자나 강박증자는 동일성이 너무 강해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신경증자로서 끊임없이 발달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전개를 해 가는 사람들이다.
자기성을 전개해 가는 사람은 타자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 안에 있는 타자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지역의 많은 나라들이 동일성이 너무 강하여 이웃과 관계 맺지 못하는 강박증적 증상을 가진 국가들이다.
그들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여, 타자와 타협하지 못하고 자기성을 포기한 채 동일성만 유지하고자 한다.
능력전승에서 구약의 신은 여호와 하나님, <I am>으로 나타났다.
다른 말로 하면, 구약의 하나님은 동일성으로서 하나님이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I am who I am.
능력전승의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내러티브로 전승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방주로 노아를 구원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의 후손을 애굽에서 노예의 삶에서 해방시키시며, 가나안 땅에서 다윗왕조를 세우신다.
동일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확고했다.
하나님의 동일성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출 3:6)으로 후손들에게 확고하게 전수된다.
하나님의 동일성으로 볼 때, 하나님은 오로지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신임에 틀림없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첫 번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였고,
두 번째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였다.
그때마다 동일성으로서의 하나님이 흔들렸다.
동일성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능력으로 구원하시고 지키시는 전능자 하나님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신실하심과 일관성, 동일성을 드러내셨다.
구약에는 두 명의 지혜자가 있다.
그들은 바로 요셉과 다니엘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이방 나라 왕의 꿈을 해석하는 자라는 점이다.
요셉을 통해 이방나라 안에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과 일관성을 나타내셨다.
여호와 하나님은 요셉의 지혜를 통해 애굽 안에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만 세워졌던 하나님의 정체성이 이방 나라 안에서도 분명하게 세워졌다.
이것이야 말로 타자 안에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 안에 타자를 발견하는 현상이다.
바벨론 포로시대의 다니엘은 요셉보다 더 큰 능력과 지혜를 드러냈다.
하나님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동일성이 무너진 바벨론 포로시대에, 유대인들은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마르둑 신이 다스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온 유대인들은 마르둑 신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함의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역신에 불과한가?
성전도 없고 절기도 지킬 수 없는 바벨론에서 유대인들은 신앙적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 해석을 통해 유대나라를 무너뜨린 바벨론 제국의 왕권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정체성을 회복하였다.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석하기 전에 다니엘은 이렇게 기도한다.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우리가 주께 구한 것을 내게 알게 하셨사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고 주를 찬양하나이다 곧 주께서 왕의 그 일을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니라(단2:23)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이제 내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이 대목 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동일성(하나님의 능력, 나의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자기성(지혜)이 동시에 나온다.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자 왕은 여호와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단 2:46-47)
바벨론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 정복당했을 때도 다니엘은 새로운 제국의 총리가 되었다.
이 모든 일이 다니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통합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능력과 지혜가 통합되는 모습은 신약에서 사도바울에게도 나타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8~19)
자기의 정체성의 두 가지 요소는 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능하신 신은 동일성으로서의 신이다.
이 신은 I am이다.
신도 자기성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I am A.이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I am the way, the truth, the life)"(요14:6)라고 말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동일성이 아닌 자기성으로 밝혔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비하, 즉 낮아짐이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 전능함을 내려놓은 것이다.
여호와는 힘과 힘의 대결에서의 힘의 절대적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혜로써 사탄을 이기셨다.
사탄의 가장 큰 권세는 사망권세이다.
예수님이 사탄을 이기실 때는 사탄이 전혀 예상치 못하는 지혜를 사용하여 사태를 뒤집어 이기고 만다.
예수님은 이 사망권세를 이기기 위해 사망권세보다 더 큰 힘을 동원하여 이긴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함으로 이기셨다.
강력한 사망권세에 져서 연약하게 죽어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죽음을 이기셨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능력과 지혜가 통합되는 곳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