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신을 필요로 하기 위해서는, 진공을 가진 세계라는 표상이 필요하다. 이것은 악을 상정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공을 견뎌 내는 것,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아닐 수 있음(힘의 논리에서
인간은 오직 섬광과도 같은 짧은 순간 동안에만 이 세상의 법칙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모든 것이 정지하는 순간, 정관(靜觀)의 순간, 순수직관의 순간, 마음이 비워진 순간, 정신적인 진공을 받아들인 순간, 바로 이 순간들에 인간은 초자연적인 것을 가질 수 있다.
한 순간 진공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초자연의 양식을 받던가 아니면 쓰러지게 된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위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무릅써야만 한다. 희망이 없을 때라 할지라도……. 하지만 스스로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Simone Weil, [중력과 은총]에서)
이 명제는 세계와 신, 그리고 진공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 문을 열어준다.
세계가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세계가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결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결핍, 또는 진공은 인간이 경험하는 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악은 그 자체가 결핍, 또는 공허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의 필요성은 악과 공허를 인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의 창조는 완전성의 창조가 아니다.
신이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해서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의미는 창조된 피조물이 하나님이 보시는 관계에서 좋은 것일 뿐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면, 그 본성이 나오게 되어 있다.
피조물의 본성이란, 결핍과 공허가 전제된 본성이다.
피조물 자체가 선하다면 진공이 필요 없다.
피조물은 아담의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물질의 본성인 악(공허, 결핍)이 드러났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결핍과 공허가 낳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이를 위해 진공을 견뎌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앎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진공, 즉 공허와 결핍을 직시하고 이를 견뎌내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는 죽음의 수용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왜냐하면 죽음은 우리 삶의 궁극적인 진공이자,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공허이기 때문이다.
이 공허를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사랑하는 행위의 본질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인간이 초자연적인 것과 접촉할 수 있는 순간을 묘사한다.
이 순간들은 모든 것이 정지하고, 마음이 비워지며, 정신적인 진공을 받아들이는 순간들이다.
이 순간들은 일종의 신성한 찰나로, 인간이 일상적인 세상의 법칙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이런 순간들은 진정한 영적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 순간이야말로 인간의 시간 안에서 '영원'을 체험하는 시간이다.
진공을 견디는 경험은 초자연적인 양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매우 위험하며, 실패할 경우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험은 신중하게 다가가야 하며, 스스로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시몬느 베이유는 희망이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도 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몬느 베이유의 사상은 인간이 신과의 접촉을 통해 초자연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진공, 즉 공허와 결핍을 직시하고 이를 견뎌내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진정한 영적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이는 세상의 법칙을 초월하는 신성한 순간들로 나타난다.
이러한 체험은 매우 위험하지만, 이는 인간이 초자연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여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시몬느 베이유의 이 글은 마치 양자의 세계를 언급하는 것 같다.
양자물리학을 알지 못하는 베이유가 자신이 터득한 진리를 언급하는데, 그것이 오늘날 양자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양자물리학에서 진공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다.
이는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상태로, 실제로는 끊임없이 입자와 반입자가 생성되고 소멸하는 매우 역동적인 공간이다.
이 개념은 베이유의 '진공' 개념과 유사합니다. 베이유는 마음속의 진공 상태를 만들어 초자연적 보상을 흡인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진공의 역할과도 상통한다.
양자 중첩: 양자 중첩은 입자가 동시에 여러 상태에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이는 '진공 상태'가 다양한 잠재적 상태를 포함하는 것과 유사하다. 베이유의 진공 상태는 모든 욕망과 기대가 제거된 상태로, 이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마음을 비우고 진공을 견디는 것은 다양한 초자연적 경험을 할 수 있는 잠재적 상태에 놓이는 것과 같다
양자 얽힘은 두 개 이상의 입자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상태가 다른 하나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이는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연결을 의미한다.
베이유의 진공 상태는 초자연적 보상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은 양자 얽힘의 개념과 유사하다.
양자 얽힘: 양자 얽힘은 입자들이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 한 입자의 상태가 다른 입자의 상태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친다. 베이유의 진공 상태는 인간이 초자연적인 것과 연결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는 양자 얽힘처럼, 물리적인 법칙을 초월하여 신성한 연결을 경험하는 것이다.
베이유는 진공을 견디는 것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무'의 개념과도 상통한다.
죽음과 무: 양자물리학에서는 '무'라는 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에너지와 상호작용으로 채워져 있다. 베이유의 죽음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궁극적인 진공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는 새로운 차원의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전환될 수 있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진공 상태가 에너지를 포함하는 역동적인 공간이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베이유는 모든 것이 정지하는 순간, 즉 정관의 순간을 언급한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관측이 이루어지는 순간과 유사하다.
관측의 순간: 양자물리학에서 입자의 상태는 관측하는 순간 결정된다. 이는 관측 이전에 입자가 여러 상태에 중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베이유의 정관의 순간은 마음이 비워지고 정신적인 진공 상태를 받아들이는 순간으로, 이 순간에 인간은 초자연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 이는 양자물리학에서 관측이 입자의 상태를 결정짓는 것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