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아내의 상태는 나의 여성성의 상태

남자에게 너무 생소한 여성성


여자는 남자를 어느 정도 잘 안다.

오히려 아내가 남편을 너무 이해를 잘해줘서 나중에 문제가 된다.

아내가 남편을 정확하게 안다기보다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서로 큰 소리 나지 않고 갈등을 피해 가는 방식을 터득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아내는 갈등 회피 방식을 택해서라도 남편을 자기 인식의 범위 안에 두지만, 남편은 아내를 자기 인식 범위 밖에 둔다.

여자가 남자를 인식범위 안에 둘 수 있는 것은 어릴 때부터 모성성을 발휘해 오면서 여성성 대신 남성성을 함께 사용해 온 긴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중년기가 되기까지 여성성을 제대로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히스테리의 형태로 오랫동안 남성성을 사용해 온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내면에 여성성이 작동하지만 너무나도 생소하다.

남자는 여자의 모성성에는 익숙해 있지만, 여성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조차 하고 싶지 않다.

어릴 때부터 남자는 여성적인 것을 얼마나 경멸해 왔던가!!

남자 입장에서는 아내는 계속 모성성만 사용해 주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면 아내는 남편을 아들처럼 대하게 된다.

아내에게 남편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양육의 대상이 된다.

남자와 여자가 연애할 때 서로 반하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억압된 것을 끄집어내어 줄 대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남자는 일단 결혼하면, 연애할 때처럼 아내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는다.

남자의 권력은 외부 세계를 향해 있기 때문에 정신도 거기에 두고 집에 올 때는 몸만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아내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내 안에 억압된 것(여성성)을 끄집어내어 줘야 하는 남편이 나한테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돈 버는 일, 사회적 활동과 성취 만족만 구하고 있다.

남편은 자기중심을 외부에 설정해 놓았으니 아내의 마음이 보일 리가 없다.

그런데 여자는 자신의 중심을 자기 내면 깊은 곳에 두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자신 안에서 여성성을 찾지 못하면, 외부적으로 아무리 화려한 인생을 살았다 해도 내면에서는 연속 헛방을 터뜨리는 인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내는 남편의 중심을 외부에서 내면으로, 또는 아내 자신에게 옮기기를 원한다.

아내는 이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싸울 때 외부 세계에 닻을 내린 남편의 중심을 아내 중심으로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남편은 그 마음의 뿌리가 외부 세계에 있기 때문에 잠시 아내의 마음을 알 뿐, 아내 중심으로 쉽게 정착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여자는 남편의 마인드를 느슨하게 풀어주면 안 된다.

남편은 이런 아내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남편과 아내는 각각 머무는 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편은 자신의 남성성으로 사회에 뿌리내리기를 원한다면, 아내는 여성성의 뿌리를 내린다.

그런데 아내의 여성성의 뿌리는 우주의 중심에 닿아있다.

여자가 ‘지금-여기의 감정’을 포기하는 순간, 그것은 곧 우주를 포기하는 것이다.


아내의 상태는 나의 여성성의 상태


여자는 왜 남편에게 분노하는가?

여자는 자신을 남편이 알아보지 않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분노를 가지고 있다.

남편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을 통합한 만큼 아내를 알 수 있다. 남편이 자신의 여성성을 알지 못하는 한, 아내를 알 수 없다.

자신의 여성성에 대해 무지하면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지만, 그것은 서로 겉모습만의 사랑이다.

아내는 남편과 ‘지금-여기의 감정’으로 만나고 싶다.

다시 말해, 아내의 여성성과 남편의 여성성으로 만나고 싶은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차원에 있으므로, 서로 일상적 대화나 토론 등으로 서로를 알 수 없다.

서로 알아가는 법은 서로 간에 갈등을 겪어냄으로써 가능하다.

즉 서로 갈등을 겪지 않고는 절대 알 수 없다.


여자가 자기 여성성을 찾지 못하여 ‘지금-여기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남편과는 정서적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중년기 이후 여성의 치매는 부부간의 정서적 거리를 보여준다.

치매가 걸리면서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된다.

두 사람은 부부로서 같은 물리적 공간에 살아도 서로 다른 존재론적 차원에 살고 있다.


중년의 부부, 여성성과 여성성의 만남


남편과 아내의 진정한 만남은 여성성과 여성성의 만남이다.

두 여성성의 만남이란 그냥 툭 떼어서 접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의 의미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부부관계가 간단해 보이지만, 마태복음(10장 34-35절)의 교훈처럼, 일평생 동안 서로 원수임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결혼이라는 안전장치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결혼한 커플 중에도 그 과정 수행을 끝까지 견뎌내지 못하고 이혼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부간의 긴 갈등의 의미를 모르면 그냥 파괴적 싸움으로 확대되면서 진짜 원수로 끝날 수도 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남편의 여성성의 상태는 곧 현재의 아내 상태요, 아내의 남성성의 상태는 곧 현재의 남편 상태다.

남자는 가정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성으로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하지만, 사회적 페르소나에 매몰되면 안 된다.

그동안 자신의 삶의 기반과 경제적 유익을 제공해 주던 사회적 페르소나는 중년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적 페르소나가 자신의 인격인 줄 알거나, 거기에 목을 매어 개인의 삶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그는 사회적 페르소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몰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바로 남자 안에 있는 여성성이다.


‘너,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

‘너, 그렇게 깨끗한 사람도 못 돼’

‘겉으로는 권위 있게 보이지만, 네 속을 들여다봐! 얼마나 지저분한가’

‘네가 그렇게 똑똑해? 잘 생각해 봐, 네가 똥과 된장을 분간 못 하던 때를...’


남자는 존재 중심을 찾기 위해서는 그의 여성성은 아내에게 닿아있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탁월하게 유능하고 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남자도 아내의 여성성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남자의 여성성은 아내의 여성성, ‘지금-여기 감정’과 상호성을 가지고 연결을 가지는 만큼 우주와 영혼에 닿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부부는 일심동체가 되어간다.

‘여자에게 여성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왜 남자에게까지 여성성이 중요해?’라는 질문을 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것을 쉽게 이해한다.

장차 오시는 예수를 ‘신랑’으로 맞이할 때 성도는 남자나 여자나 모두 ‘신부’가 된다. 이러한 이해는 여성성, 여성적 언어가 곧 치유적 언어이자, 우주적 언어가 된다는 것도 깨닫게 만든다.

남자가 사회적 페르소나로 외부 세계에만 닿은 상태에서 내면의 여성성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아내의 여성성, ‘지금-여기 감정’을 외면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런 남자는 가정사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고, 사회적 성취에 초점을 맞춰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분명한 구획을 정해서 남편은 밖의 일에만, 아내는 집안일에만 신경 쓰는 것이 거의 일반적이다.

그때 남자는 그 집안에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남자는 아내뿐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남편과 정서적 교류 없이 남편이 돈만 잘 벌어다 주면 '만사형통'으로 여기는 여성도 적지 않다

그것은 부부간 정서적 거리 좁히기를 포기한 것이다.

이런 여성은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것이 불편하고, 장기간 출장을 가서 자주 안 볼 수 있으면 너무 고맙다.

아내가 이런 가정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남편이 집안일에 관여하거나 아내의 감정을 살피는 일, 자녀들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조차 불편하게 느낀다.

1997년 IMF 때 국가적으로 큰 시련을 만났을 때 이런 관계에 있던 부부는 자신들의 정서적으로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많은 부부가 이혼하고 남편이 노숙자로 전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부부간에 정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남자는 내면이 자라지 못한 원래의 상태로 급격하게 돌아갔다.

유아기로 퇴행한 노숙자는 종이박스만 있으면 유아처럼 뒹굴뒹굴 드러눕고 싶다.

꼭 IMF가 아니라도 이런 사태를 찾아온다.

은퇴하는 순간, 남편은 자신의 내면세계를 챙겨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급격하게 정서적 어린아이 상태로 내려간다.

그때부터 아내가 엄마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남편은 아동기 상태로 내려간다.

아내는 그동안 자신의 여성성 찾기 작업을 외면한 남편에 대한 보복을 시작한다.

자녀는 이미 엄마 편이기에 아빠에게는 관심이 없다.

어디 발 둘 곳이 없어진 남편 중에는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자존심 내려놓고 살길을 찾기도 한다.

극단적인 경우, TV 프로 <자연인>이 되기를 오래전부터 시청하면서 꿈꿔 오던 자연인의 삶을 실천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의 남자는 이런 상태를 견디지 못해 자살하기도 한다.

이 같은 일은 20~30년 전에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마가렛 미드의 말처럼 사람의 평균수명 50세~ 60세일 때는 이런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는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면서 남자의 삶과 여자의 삶의 형태가 완전히 바뀌고 있다.

이제 과거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가정마다 예기치 못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다.


사랑과 환멸을 경험하는 부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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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의 <유키즈 온 더 블록> 프로그램에 카이스트 대학의 뇌과학자 김대수 교수가 출연한 적이 있다.

그는 사랑의 3단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설명하였다.


1단계; 사랑에 대한 간절함 => 2단계; 사랑의 시작과 몰입 => 3단계; 애착 형성


1단계는 낭만적 사랑의 단계이다. 남녀가 연애할 때는 이 낭만적 사랑이면 된다. 이 사랑은 신화적이며 로맨틱하지만 길어야 3년의 유효기간을 갖는다.

2단계는 낭만적 사랑이 끝나면, 새로운 형태의 사랑, 더 깊은 사랑이 시작된다.

3단계의 애착형성은 각자에게 배우자의 뇌가 형성된다고 한다. 남편에게는 아내의 뇌가 형성되고, 아내에게는 남편의 뇌가 형성된다.

이때는 서로를 향해 심장도 뛰지 않고, 신체적으로 강렬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지만, 뇌로 서로 연결된다고 한다.

‘뜨겁지는 않지만 없으면 섭섭하고, 정으로 애착관계를 형성해서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김대수 교수의 결론은 ‘사랑은 신경의 연결’이다.

내가 보기에 사랑이 부부관계를 뒷받침해 주지만, 그 사랑이 일상이 되기 위해서는 뜨거운 사랑만으로는 안 된다.

낭만적 사랑을 나눌 때는 사랑이면 된다.

그 사랑도 그냥 사랑이 아닌, 뜨거운 사랑이어야 한다.

뜨거운 사랑은 모든 미움과 증오, 환멸을 녹일 것처럼 활활 타올라 그 순도가 매우 높다.

낭만적 사랑이 끝나고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랑과 증오(환멸)이라는 변증법적 구조를 거치는 사랑이 필요하다.

낭만적 사랑의 유효기간이 끝나면 뜨거운 사랑은 식는다.

식는다고 했지, 사랑이 없어진다고는 안 했다.

사랑의 온도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뜨거움은 금방 식지만,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사랑을 저장하는 온도를 바꾼다.

뜨거운 사랑에서 냉랭한 사랑으로 넘어갔다가 차가운 사랑이 되기도 한다.

남편이 말이 안 되는 실수할 때, 차가운 사랑은 갑자기 상대의 상태를 봐주지 않고 순식간에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사랑으로 바뀌기도 한다.

남편은 자기가 실수를 해도 아내가 분노로 폭발하기까지 실수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여성성이 충만한 여자는 직관적으로 금방 알 수 있는 실수를, 남자는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아는 경우가 많다.

남편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니까, 아내가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지부터 이해하려고 <논리적>으로 따져본다.

여자는 따져보지 않아도 척 보면 아는 것을 남자는 하나하나 곱씹어 봐야 아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진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내 친구 중에 백일현이라는 고교 동창이 있다.

은퇴 후, 퇴직금으로 EDIYA 카페를 운영할 결심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부동산 중개업자를 통해 가장 좋은 장소를 찾아냈다.

그리고 아내를 대동하여 아내의 재가를 받아 그 장소를 결정하여 커피점을 열었다.

그때 아내가 남편에게 “좋은 장소를 찾았으면 혼자 결정하면 되지, 왜 꼭 이렇게 내가 와야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불평했다.

그랬더니 부동산 업자가 “제가 오랫동안 부동산업을 하면서 지켜보니, 남자들이 나이가 들수록 중요한 일에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더라고요.

꼭 부인이 와서 최종 결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하더란다.

이 정도면 친구 부부는 사랑과 환멸의 변증법을 어느 정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사랑만 경험한 부부의 남편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독재적이고, 폭압적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자기 결정권’이다.

현명한 남자는 아내의 '자기 결정권'을 보다 일찍 부여하는 사람이다.

물론 나는 그렇게 현명한 남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이렇게 깨닫는 계기를 얻었다.

나의 어리석음은 아내를 힘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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