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우선주의가 되기 위하여
내가 오랜만에 집에 갔는데, 혼자 갔다. 집에 아무도 없다. 병원에 갔단다. 아버지가 아프시단다. 병원에 가보니, 아버지와 엄마와 형이랑, 사촌형까지 와 있었다. 형이 "너는 왜 연락도 안 되느냐?" 아버지에게 물으니 암에 걸리셨단다. 3개월밖에 못 산단다. 슬퍼서 울었다. 울면서 꿈에서 깼다. 깨고 나서도 되게 슬폈다....
꿈이었다. 그는 깨어나고 나서도 한참을 울었다. 꿈속에서 그는 오랜만에 집에 갔고, 집은 비어 있었다. 가족들은 병원에 있다고 했다. 병원에 가보니 아버지가 암에 걸렸고, 시한부 3개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옆엔 엄마와 형, 사촌형이 있었고, 형은 그를 향해 “왜 연락도 안 되느냐”라고 질책했다. 그리고 그는 그 앞에서 눈물을 쏟았다. 너무도 진한 슬픔이었다. 아버지가 죽는다는 사실이, 떠난다는 그 이미지가 가슴을 무너뜨렸다.
이 꿈은 단지 어떤 불안이나 염려의 반영이 아니다. 그는 이 꿈에서 뭔가를 떠나보내고 있었고, 진정으로 애도하고 있었으며, 깊이 울고 있었다.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지 현실의 병이나 죽음을 예감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을 통과하는 슬픔이었다. 바로, ‘심리적 부친살해’—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로 서기 위한 통과의례였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다. 유교적 전통은 효도를 가장 높은 미덕으로 설정했다. 부모에 대한 순종, 존경, 헌신은 인간됨의 기본이며, 이데올로기적 ‘정상 가족’의 기초였다. 자녀는 부모를 위한 삶을 살고, 부모는 자녀를 통해 영속된다.
이 질서는 너무 오래 우리 안에 내면화되어, ‘내가 누구인가’보다 ‘내 부모가 누구인가’가 더 먼저 불려진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오늘날 인간은 더 이상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로 살아간다. 특히 결혼이라는 사건은, 이러한 전환을 분명히 요청한다. 한 인간이 가문을 떠나, 자신의 세계를 꾸리는 결정적 사건. 바로 부부 관계가 가족의 중심이 되는 전환이다. 부모 우선에서 배우자 우선으로의 이동. 이 자리에 서려면, 내면에서 부모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작업이 반드시 수반된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전환의 시기에 있다. 한 달 후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 이 꿈은, 외부로부터 주어진 운명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내면에서 스스로 준비한 의식이었다. 그는 지금 심리적으로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중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부친살해’는 말 그대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결정권을 외부가 아닌 내 안으로 가져오는 과정, 즉 부모의 권위로부터 독립하는 심리적 과정이다.
고대 신화 속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욕망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금기와 욕망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체화의 통과의례로 해석된다.
그는 이 꿈에서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 그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중요한 점은, 이 죽음은 타율적으로 주어진 죽음이 아니라, 내가 목격하고 애도하는 죽음이라는 것이다.
꿈속의 나는 너무 슬퍼했고, 울었으며, 깊은 죄책감도 느꼈다. 이는 ‘죽이고 도망치는’ 반항이 아니라, 존재적으로 아버지를 품고 보내는 의식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진정한 부친살해이다. 단절이 아닌 성숙한 이별, 회피가 아닌 감정의 통과로서의 독립.
이 꿈은 단순한 감정의 반응이 아니다. 이 남자는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 결혼이라는 생애 전환점을 앞두고, 그의 무의식은 깊은 정리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부모 곁을 물리적으로 떠나야만 결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짜 이별은 심리적으로 아버지의 권위와 자리에서 감정적 분리를 완수하는 일이다.
그는 지금 ‘효자’라는 정체성을 내려놓고, ‘남편’이 되려 하고 있다. 그를 지탱하던 가문의 울타리에서 나와, 스스로 울타리가 되려는 순간이다.
이 꿈은 그 첫걸음이다.
떠나보내야, 사랑할 수 있다.
결혼은 단지 사랑의 결과가 아니다. 결혼은 하나의 삶의 철학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는 이제 누군가와 함께 가족을 이룬다. 이 가족은 내게 새롭고, 어쩌면 부모보다 더 가까운 세계가 될 것이다.
유교사회에서는 부모가 삶의 1순위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결혼을 통해 배우자 우선, 우리라는 공동체 우선의 삶을 시작하려 한다.
이를 위해선, 부모라는 존재가 내 삶의 정체성 핵심에서 한 걸음 물러서야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위해, 그의 무의식은 이 꿈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아버지를 병들게 하고, 떠나보내고, 슬퍼하며, 끝내 감정적으로 해방되는 과정. 이 꿈은 그의 결혼 준비의 한 장면이었다. 예복도, 청첩장도 아닌, 내면에서 울며 쓰는 작별의 시였다.
꿈을 꾼 그날, 하루 종일 가슴이 먹먹했다. 하지만 그 먹먹함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깊은 정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끝냈고, 어떤 시절을 접었다. 그리고 그것은 감정 없이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애도를 통해 수용하며 이별하는 과정이었다.
심리적 부친살해란 ‘죽이기’가 아니다. 그것은 ‘보내기’다. 내 안에서 권위를 차지하고 있던 아버지라는 거대한 기둥을 잠시 껴안고, 울며 작별한 뒤, 이제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서겠다는 다짐이다.
그리고 이 애도의 작업을 마친 그는, 새로운 가족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부모의 자리에 있었던 존재가 물러나고, 이제 부부 중심의 가정을 꾸려 나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결혼이고, 그것이 성숙이며, 그것이 부부 우선주의자라는 새로운 삶의 정체성이다.
꿈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 꿈은 그에게 아버지의 병과 죽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뜻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해방이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배우자와 함께할 준비가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자격이 생긴 것이다.
이 꿈은 그의 인생의 통과의례였고, 그 슬픔은 그가 새로운 나로 태어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제 나는 울고, 떠나보내고, 맞이한다. 부모의 자리를 정리하고, 배우자의 자리를 준비하며,
‘부부 우선주의자’로 새롭게 걷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울음이었고, 그 끝은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