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6일과 138억 년의 간극,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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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과 138억 년 사이에서, 나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한 번쯤은 이 질문 앞에 멈춰 서게 된다.


성경의 6일 창조와, 과학이 말하는 138억 년의 우주는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이 질문 앞에서 둘 중 하나를 포기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과학을 의심하거나,

과학을 받아들이기 위해 성경을 신화로 밀어낸다.


하지만 정말 그 둘은 서로를 파괴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관계일까.

나는 오히려 이 질문이야말로,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신 분인가를 묻는 가장 정직한 신앙 고백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별과 내 안의 도덕법칙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마음을 경외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내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에 있는 도덕법칙이다.


이 문장은 언제 읽어도 묘한 울림을 준다.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과, 자기 안을 성찰하는 인간의 양심이 사실은 하나의 근원에서 흘러나왔다는 암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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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 제럴드 슈뢰더는 그의 책 『신의 과학』에서 바로 이 지점에서 사유를 시작한다.

하늘의 별, 곧 우주와 인간 안의 도덕법칙, 곧 신앙은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말이다.


나 역시 그렇게 믿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신앙의 언어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과학의 언어로도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과학이 하나님을 지워버린다면, 그 과학은 너무 얕은 것이다.

그리고 만일 신앙이 과학을 두려워한다면, 그 신앙은 너무 좁다.


6,000년이라는 숫자가 가두어 버린 하나님


신앙의 이름으로 가장 자주 오해되는 것이 있다.

이른바 ‘지구 나이 6,000년 설’이다.

창세기의 족보를 문자적으로 계산해 우주의 역사가 6,000년에 불과하다고 믿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 중 상당수는 빛의 속도로 6,000년을 달려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거리보다

수억 배나 더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이미 과거를 보고 있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별빛은 어쩌면 수억 년 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0년이라는 숫자를 지키는 것이 보수적인 신앙의 표지인 것처럼 말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작은 틀 안에 가두고 만다.


하나님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축소시키는 아이러니.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신앙의 함정이다.


138억 년과 6일은 어떻게 만나는가


현대 과학은 WMAP 위성을 통해 우주의 나이를 약 138억 년으로 계산해 냈다. 과학계에서는 모두가 인정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되는 수치이다.

그렇다면 성경의 ‘6일’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슈뢰더는 여기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불러온다.

중력이 강할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빅뱅 직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밀집된 우주에서 시간은 지금과 전혀 다른 속도로 흘렀다.


그 시점에서의 하루는 지금의 시간 기준으로 수십억 년에 해당한다.

우주의 팽창과 함께 중력이 약해질수록 시간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이 계산을 적용하면, 성경의 6일은 과학이 말하는 138억 년과 놀라울 정도로 맞닿는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일치가 아니다.

성경의 ‘날’은 인간의 시계로 잰 하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프레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종말을 계산하려는 불안에 대하여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

이 말씀은 종종 인류 역사를 7,000년이라는 도표로 재단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의 시간을 인간의 계산으로 줄이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의 시간은 인간의 표로 환산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종말을 날짜로 예측하려는 집착은 신앙이라기보다 불안에 가깝다.

하나님을 기다리기보다 하나님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마음의 또 다른 얼굴이다.


진화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진화론은 종종 ‘과학적 진리’처럼 말해지지만,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하나의 거대한 가설이다.

현대 학문의 많은 영역이 이 가설 위에 세워져 있기에 마치 의심할 수 없는 토대처럼 느껴질 뿐이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기원,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찰스 다윈 역시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기존의 문자적 창조 이해와 충돌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조심스러웠다.

초판의 마지막에


“조물주가 소수의 생명체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라는 문장을 남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빛이 있으라”라는 포맷팅 명령


“빛이 있으라.”

이 말씀은 단순한 조명의 점등이 아니며, 가시적으로 보이는 빛이 아니다.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던 우주라는 하드웨어에 존재의 질서를 가능하게 하는 운영체제를 설치하신 선언에 가깝다.


그 순간, 시간과 공간이 펼쳐지고, 중력과 물리 법칙이 기본값으로 입력되었다.


과학이 우주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법칙이 우연이 아니라 이미 설정된 질서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하나님의 설계를 지우는 작업이 아니라, 그 설계도를 한 줄씩 읽어 내려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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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의 간극은 모순이 아니라 초대다


성경의 7일 창조와 과학이 말하는 138억 년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거대한 간극은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시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신 분임을 드러낸다.


나는 이 두 세계를 함께 읽고 싶다.

문해력으로 성경을 읽고, 인문학으로 신앙을 사유하고,

과학으로 창조를 바라보는 삶.


이 길이야말로 신앙을 더 성숙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 크게 만나는 길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오늘도 창세기 1장의 고백을 품은 채 138억 년의 우주를 살아가고 있다.

그 사이에서 질문하고, 사유하고, 경외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시대의 신앙인에게 주어진 가장 정직한 태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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