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시작하다(2) : 인문학으로 성경 읽기

성경은 아주 오래된 책이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죠. 우리가 이 거울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인문학이라는 안경이 왜 필요한지, 네 가지 이유로 쉽게 설명

드릴 겁니다.

그 네 가지 이유가 끝나고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왜 그리고 어떻게 인문학이 기독교 신앙 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말씀드릴

겁니다. 우리는 이미 인문학이 기독교 안에 들어온 역사 속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이 왜 필요한가?


1. 인문학은 성경이라는 거대한 세계 안에 '나 자신'을 찾아가는 지도이기 때문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텍스트를 읽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해석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옛날이야기를 공부하려는 게 아니죠. 성경 속 인물들의 절망, 기쁨, 방황을 보면서 '아, 이게 바로 내 모습이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성경이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진짜 나를 발견하도록 돕는 지도가 되어줍니다.

일부 목회자들은 인문학을 인본주의로 몰아갑니다. 기독교는 신본주의인데 인본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극도의 무지에 해당한다는 사실입니다.

18세기 청교도 신학의 완성자이자 부흥운동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성령 역사 분별방법]이라는 책에서 당시 기독교 운동에서 성경만 읽어야 하고 다른 책을 읽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대해 이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학교가 왜 필요한가". 성경만이 진리니까, 성경의 진리에 다른 것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모두 인본주의에 해당합니다. 그분도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학교에서 인본주의를 기를 쓰고 배웠을 겁니다. 자신의 자녀들을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학원비 들여가면서 열심히 인본주의를 가르치면서, 교회 안에서는 인본주의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을 인본주의로 몰아가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의 말씀이 진정성이 있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교회 주일학교만 다닌 무학자여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본 어떤 극단적 보수주의자는 무좀이 났는데, 이를 낫기 위해 약을 안 바르고 금식기도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성도는 세상적으로 무식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2. 내 마음의 깊은 '무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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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성경에는 꿈, 환상,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상징들이 참 많죠? 심리학자 칼 융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보편적인 마음의 문양'이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정신분석학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느끼느냐는 사실 우리가 어린 시절 부모님과 맺었던 관계와 연결될 때가 많습니다. 또한 어릴 때 엄마의 품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가 힘들다고 말을 합니다. 아기들은 어머니의 품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을 느끼고,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정신분석은 내가 왜 특정한 성경 구절에 유독 아파하는지, 왜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느끼는지 그 마음의 뿌리를 보게 해 줍니다. 상처를 알아야 진정한 치유의 말씀도 들리기 시작하거든요.


3. '나만의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 내 욕심이나 고집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착각하곤 합니다. 이걸 정신분석에서는 '방어기제'나 '나르시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인문학적 성찰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인가, 아니면 네 마음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인가?" 이렇게 자신을 정직하게 의심해 보는 과정을 거칠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욕망의 감옥을 깨고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4.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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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을 하다 보면, 혹은 내 삶이 무너질 때, 성경 구절 한 줄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정답만 말하는 성경이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죠. 이때 인문학은 그 막막한 고통에 이름을 붙여주고 정리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던 슬픔을 글로 옮기고, 성경의 이야기와 연결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고통을 견뎌낼 힘을 얻게 됩니다. 인문학은 성경의 진리가 우리의 차가운

머리에서 뜨거운 가슴으로 내려오게 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5. 마무리하며


사람들은 성경 안에 우리 삶에 관한 모든 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그 답을 맞히기 위해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답이 성경 안에 있지만, 그 답을 풀어가는 해답은 내 삶 속에 있고, 세상 속에 있습니다. 내 삶 속에서 풀이를 해 가는 과정에서 성경에 있는 정답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 읽기에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바로 '사람'을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구체적인 아픔과 고민 속에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인문학이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할 때, 성경은 비로소 죽은 문자가 아니라 우리 삶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두 가지 이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의 첫 번째 이름은 예수입니다. 그 뜻은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두 번째 이름은 이사야 9:6절입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기묘자, 모사는 영어로 두 개의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wonder counsellor"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을 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 들어오셔서 훌륭한 상담자가 되어 주십니다. 어떤 면에서 이 땅의 모든 상담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인문학이 어떻게 기독교 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것이 왜 필요한가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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