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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현 Jun 09. 2021

미안하다는 것으로는 아동학대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동학대 대책에 어린이·청소년인권의 신장이 필요한 이유


아동학대는 새로 생겨난 문제라기보다는 '발견된' 문제, '새삼스레 인식되고 있는' 문제이다. 아동학대란 말이 있기도 전부터 이미 아동에 대한 학대는 존재했다. 친권자·보호자가 어린이·청소년에게 강제로 돈을 벌어오게 시키거나 '팔아' 버리는 일이 흔했던 적이 있었다. 가족 내에서 폭행이나 정서적 학대, 방임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학교에서는 각종 구타와 '기합 주기', 고문 행위가 교육이라며 벌어졌고, 이 역시 21세기가 된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아동학대는 사회적·신체적 약자인 어린이·청소년에 대하여 수십 년, 아니 수백수천 년 전부터 형태만 달리하며 반복되어 온 폭력이다. 그러므로 참혹한 아동학대 사건 앞에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라며 놀라는 것은 적절치 않다. 보다 적절한 질문은 '우리는 왜 아동학대를 없애지 못하고 있나?'일 것이다.


2020년 10월, 서울시 양천구에서 생후 16개월 어린이가 부모의 학대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사건을 조명한 뒤, 범인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각계각층에서 나왔다. 한데,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되고 관련 법 제도가 정비된 것이 2014년이었다. 그럼에도 지난 몇 년간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이 몇 차례씩 신문 헤드라인을 차지하곤 했다. 아동학대 사건 수의 급격한 증가 자체는 우리 사회가 학대에 민감해져 암수범죄가 발견·집계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동학대로 인한 상해, 사망 사건이 빈발하는 것은 새로 정비한 제도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사건에서도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아동학대를 없애려고 제도를 만들고 고쳤는데도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나?'일 것이다. 


학대의 일상성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우리 사회의 아동학대에 관한 인식 틀의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아동학대는 아주 일상적인 공간과 관계 속에서 주로 '보호자'(친권자, 후견인, 보육 노동자, 교사 등)에 의하여 발생한다. 그리고 그 원인에는 어린이·청소년의 취약한 위치 그리고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친화적인 문화와 구조가 있다. 아동학대는 평범한 사람에 의해서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 속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몇몇 정도가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에 경악하며 범인에 대한 비난에 열중하다 보면, 아동학대의 이러한 일상적·구조적 성격을 지우고, 문제 있는 악인들의 범죄 행위로 문제를 바라보기 쉽다. 그러면서 입양 여부나 질병 여부 등 아동학대행위자들의 특수성으로 학대 원인을 설명하려 든다. 서울 양천에서의 사건에서 나온 "○○아(피해자의 이름) 미안해"라는 말도 '우리 사회가 학대에 책임이 있어서 미안하다'라는 말보다는 '저런 나쁜 사람들로부터 구해/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에 가까운 맥락으로 쓰인다. 


하지만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들의 배경에는 수없이 많은 '별거 아닌' 아동학대의 일상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가 체벌에 허용적이라면, 상대적으로 폭력에 둔감한 어느 친권자나 교사는 '허용된 체벌' 도중에 상해를 입힐 정도로 강도 높은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다. 주변에서 상처를 발견하더라도, 잘못해서 가르치려다가 그랬다는 변명을 듣고는 학대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그냥 넘어갈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이는 최근 사건들에서 아동학대에 조기 대처하지 못한 이유를 추적해 보면 반복하여 등장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9~17세 어린이·청소년 중 57.4%(정서학대 피해 53.9%, 신체학대 피해 29.9% 등)가 아동학대 피해를 경험했다는 연구(류정희 외, 2018, 〈생애주기별 학대 경험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가 있을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아동학대는 일상적이다. '별거 아닌' 아동학대가 만연한 현실에서는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도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리얼미터의 2019년 5월 여론조사에서 가정 내 체벌 금지를 위한  〈민법〉 개정에 반대하는 의견이 47%로 나타났다. 심각한 아동학대 사건에는 다들 분노하지만, 비청소년 절반가량은 어린이·청소년에게 체벌 등 폭력을 가해도 되고 가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순된 모습은 아동학대에 대한 대처가 부실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 준다.


연민의 한계 


학대당한 어린이·청소년이 어떻게 다쳤고 고통받았는지를 드러내는 방송 장면 등이 공유되면서 연민과 분노가 번지고 국회에서도 앞다투어 법을 개정하는 것은 여러 번 반복된 패턴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만들어진 법 제도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인력과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았고 법대로 집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2014년 개정된 〈아동복지법〉은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시·도 및 시·군·구별로 1개 이상 두어야 한다고 규정했으나, 2020년까지도 아동보호전문기관의 개수는 그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기관이나 일시 쉼터 등 인프라도 부족하고 안정적인 인력도 갖춰지지 않은 실정이다. 아동학대 대응 관련 정부 재원은 한정된 기금에 기대고 있으며 관련 예산은 국회에서 대폭 삭감되기 일쑤이다. 2021년도 보건복지부 예산에서도 아동학대 방지를 위한 추가 요청 예산이 전액 삭감된 바 있다.


학대 피해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연민은, 안타깝게도 실질적인 자원의 배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법을 개정하여 아동학대를 막겠다고 장담하던 정치인들은 예산을 심의할 때는 지역 개발 예산 등 선거권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예산을 우선했다. 그나마 양육비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는 정책과 예산은 관심을 받았지만, 학대를 당하는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예산은 외면당했다. 어린이·청소년 집단은 참정권을 제한당하고 사회적·정치적 힘이 약하다. 그로 인해 정부 예산 등 자원 배분에서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나온 지적이다. 


미안하다는 연민의 말, 어린이·청소년을 불쌍해하는 것으로는 아동학대에 대해 실효성 있는 대처를 끌어낼 수 없다. 어린이·청소년 참정권이 확대되고 사회적·정치적 세력과 힘을 가지며 참여할 수 있어야만 정부 예산 등 사회적 몫을 정당하게 배정받을 수 있다. 어린이·청소년의 삶의 문제를 무시하면 정치적 손해를 입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아동학대 문제가 오랫동안 공론화되지 못한 원인 중 하나 역시, 나이주의가 심하고 어린이·청소년의 시민적·정치적 권리 보장 수준이 낮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이·청소년 삶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정부가 아동학대를 가족 해체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고 가족 회복을 지원한다는 기조로 정책을 펴는 것도 한계이다. 빈곤 등 가족의 생활을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들이 학대가 일어나는 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돌봄과 교육의 책임이 개별 가족에게 과중하게 지워지고 있고, 어린이·청소년이 가족을 벗어난 삶과 사회적 관계를 갖기가 어렵다는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는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돌봄이나 교육의 책임을 가족, 특히 어머니에게 독점적으로 지운다. 그리고 이는 가족(어머니)에 크나큰 경제적·심리적 부담이 될 뿐만 아니라 그만큼의 독점적인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환경에서 어린이·청소년들 스스로도 폭력 등 학대를 겪더라도 가족에서 벗어나기를 두려워하게 되고 가족 관계에 매달리게 된다. 초장시간의 학습시간이나 노키즈존 등 어린이·청소년을 배제하는 문화는 어린이·청소년이 공공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누리기 어렵게 한다. 어린이·청소년의 삶의 폭이 제한될수록 학대 등의 인권침해에 대처할 수 있는 자원과 역량도 줄어든다. 


시설에만 머물 수 있는 존재가 권리를 가질 수 없듯이 가족에게만 머물 수 있는 존재 또한 권리를 가질 수 없음은 자명하다. 내가 어떠한 삶을 살고자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기 전에 국가와 가족이 결정을 대리하는 그곳에서 폭력과 차별은 은폐되고, '보호'라는 논리 아래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가 정당화된다. (……) 불안전한 삶의 핵심은 삶의 장소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며, 강제된 관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삶으로의 이동이 봉쇄되는 것이다.
- 김순남, 〈강제된 장소, 강제된 관계를 질문하는 탈시설 운동〉, 장애여성공감 엮음, 《시설 사회》, 38~40쪽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돌봄을 사회가 책임지고 공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물론, 어린이·청소년이 가족 외에도 여러 곳에 소속되어 관계 맺고 참여하고 살아갈 수 있어야 아동학대를 예방하고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가족을 벗어나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 적절한 주거와 다양한 관계가 보장되어야 학대가 발생하는 가족의 문제를 감추고 참지 않고 다른 삶을 모색할 수 있다. 아동학대가 정말로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아마 생각보다 더 많은 변화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 2021년 2월 〈프레시안〉에 쓴 글을 고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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