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개인적 기억과 소회
충남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이 어제(2023년 12월 15일) 충청남도의회를 통과했다. 이후 재의요구 등이 있을 걸로 예상되지만, 그 자체로 충분히 암담한 소식이다.
지금 준비 중인 학생인권조례 단행본에 실을 글로 쓴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개인적 기억과 소회'인데, 편집자가 책 성격에 맞지 않다고 하여 실리지 않을 듯싶어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한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했던 것은 2000년, 막 ‘새천년’이 시작된 때였다. 어릴 적에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나에게도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던 그 무렵의 분위기 같은 것은 선명한 듯, 모호한 듯 기억에 남아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건 세상이 바뀔 거라는 기대, 일종의 낙관주의였다고 할 수 있겠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의해서든, 정치와 문화의 변화에 의해서든 21세기에는 더 나은 세상이 펼쳐질 거라는 전망과 기대감이 각종 매체를 통해 표현되곤 했다.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는 새 시대의 마중물처럼 느껴졌다. 경제적으로는 1997년 외환 위기 사태의 상흔이 깊었지만, 한국 정부는 2000년에 IMF에 빚을 모두 갚아 위기를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새로운 세기는 큰 고난을 이겨 낸 만큼 더욱 빛날 것 같았다.
현대사를 좀 공부해 본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런 낙관적 분위기의 밑바탕에는 1990년대에 한국 사회 전반의 민주화·자유화가 진전되어 온 경험이 깔려 있었을 듯싶다. 또 거슬러 올라가면 1987년 6월 항쟁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 그리고 노동자 대투쟁과 노동 소득 분배율의 증가 같은 역사적 사건과 변화를 꼽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가 2학년 때였나 3학년 때쯤에 초등학교로 명칭이 변경된 것도 직접 목도한 상징적인 변화 중 하나였다.
그런데 정작 나에게 2000년은 그런 ‘새천년’의 낙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0년 봄은 어두침침하고(내가 다닌 중학교의 교복은 심지어 어두운 자주색이라는 기묘한 색깔이었다) 갑갑한, 덤으로 춥기까지 한 교복을 입고 8시 20분까지 등교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머리카락은 학교 규칙에 맞춰 ‘반삭발’보다 조금 긴 정도의 헤어스타일로 잘라야만 했던 숨 막히는 날로 기억되고 있다. 이럴 수가. 이것이 21세기의 대한민국 학교란 말인가.
여기에서 내가 학교에서 겪은 인권 침해를 일일이 열거하는 일은 적절치 않다. 무엇보다도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른 자리와 지면을 통해 여러 번 경험담을 이야기한 적도 있고 말이다. 그래도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장면 몇 가지는 소개해 보려 한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당연히 교복은 강제였고, 등굣길이나 용의 단속 시간이면 교복 길이나 바지 폭 등을 고쳤는지도 검사 대상이었다. 머리카락이 지저분해 보인다는 이유로 가위나 바리캉으로 학생의 머리에 ‘땜빵’을 만들거나 ‘쥐 파먹듯이’ 한쪽만 자르는 일도 한 번씩 일어났다. 고등학교에서는 1교시 시작보다 30~50분 일찍 등교하여 아침 자습, 점심시간 40분 자습, 밤 10시까지(기숙사에서 생활하면 11시까지) 자습이 강요되었다. 본래 남학교였다가 공학으로 바뀐 고등학교에서는 이성 교제 시 징계한다는 규정이 있었음은 물론 이성 교제가 알려진 동아리는 폐쇄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초·중·고 시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학업 성적에 따른 차별이나 입시를 목표 삼은 교육이 주는 압박감, 그리고 소수자 배제적인 분위기 등은 굳이 말할 것도 없겠다.
또 다른 초·중·고 전체에 걸쳐 있는 문제로 체벌과 언어폭력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는 빈도는 적지 않았지만 비교적 약하게 손바닥, 발바닥을 맞는 것이나 ‘손 들고 서 있기’ 등의 체벌이 주된 것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때부터는 체벌의 강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구타 수단의 크기 등이 커졌고(칠판용 컴퍼스, 죽도, 목검, 단소, 리코더, 당구큐대 등 어찌나 다양하던지) ‘엎드려뻗쳐’를 하고 엉덩이-허벅지 언저리를 맞는 일도 흔했으며 ‘오리걸음’, ‘앉았다 일어났다’, ‘운동장 몇 바퀴 달리기’ 같은 체벌은 주간 이벤트였다. 모욕감을 느끼게 할 법한 손찌검들도 일상적이었고 중학교 때 상습적으로 자는 학생에게 교사가 쓰레기통 물을 뒤집어씌운 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성적이 안 나온단 이유로, 수업 시간에 떠들었단 이유로, 규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간간이 욕설이 섞인 폭언이나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니까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내가 경험한 초·중·고 학교는 민주화된 사회의 학교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앞에 내세우곤 하는 자율, 민주 시민, 참여, 주인의식, 평등, 다양성 같은 단어들보다는, 폭력, 차별, 억압, 독재, 상하관계, 획일성 같은 단어들이 훨씬 어울렸다. 그러니 내 생각에는 이런 학교 현실에 불만을 안 가지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다. 누군가는 ‘원래 학교는 이런 것’, ‘학생/애들에게는 당연한 일’, ‘몇 년만 참으면 된다’ 하고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저 나는 그렇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청소년인권운동을 만나게 됐고 ‘이런 문제에 사회운동으로, 조직적으로 저항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닫고는 청소년인권운동의 활동가가 되었다.
사실 내가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한 것은 고3 때였고 재학 중에 운동이라고 할 만한 걸 한 기간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청소년인권운동에 대한 인식 없이 나 홀로 체벌이나 두발규제 등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했던 사건을 포함시켜 봐도 1년 반 남짓일까. 따라서 나는 내가 몇 개월 투쟁함으로써 내가 이 학교의 학생으로 있는 동안 무언가를 바꿀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다만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말하기를 참을 수 없었고, 발언하고 저항함으로써 나의 존엄을 지켰다. 무엇보다도 나의 행동과 다른 활동가들의 행동이 연결되고 쌓여서 나중에라도, 마침내 학생인권이 개선될 거라고 믿었다.
그리 대단한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2005년에 처음으로 청소년인권운동을 시작했을 때 주력한 의제는 두발자유화였다. 그때 전국적으로 두발자유 캠페인과 서명운동,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기획해 본 거리집회에서도 ‘두발자유화’와 ‘학생회 법제화’를 내걸었다. 학생들이 자기 머리카락을 기르든 자르든, 염색을 파든 파마를 하든, 뭘 바르든 말든 자유롭게 하게 하라. 이런 소박하다면 소박한 요구 사항을 가지고 주장하고, 서명운동을 하고, 집회를 했다. 그때는 몇 년만 싸우면, 아무리 오래 걸려도 10년 정도면 대충은 이루어 낼 줄 알았다. 아마도 2015년 정도면 ‘여전히 두발 규제를 고집하는 소수의 학교들’ 사례를 찾아서 ‘아직도 이런 학교가 있다니!’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다.
아시다시피,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23년에도 두발자유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변화한 점도 있고 평균적인 규제의 정도도 많이 완화되었지만, ‘학교에서 두발규제를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원칙이자 상식으로 여겨지는’ 데까지는 아직 멀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살아생전에 두발자유화 하나만이라도 이루는 것이 꿈이다. 사실 대단한 일 아닌가? 전국 수백만, 수십만 명의 학생들, 아니 미래의 연인원으로 생각해 보면 수억 명일 수도 있는 학생들의 머리카락의 자유에 기여한 바 있다니, 일개인으로서는 과분한 명예이고 업적이다.
두발자유화라는 어찌 보면 사소해 보이는 것조차도 사회적 변화를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다. 사회가 민주화되고, 독재 정권이 물러나 ‘장발 단속’, ‘통행 금지’ 같은 일이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만 회자되어도 학교가 저절로 변하지 않고 학생인권 현실이 아주 더디게 나아진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이후로 학생인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교문을 두드리고 소란을 만든 이후에야 비로소 작은 변화라도 시작되었다. 나의 졸저 《유예된 존재들 – 청소년인권의 도전》에 대한 리뷰를 써 준 소설가 김보영은 이렇게 적었다.
“모든 것은 이루어지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이루어지고 나면 당연해서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일이 된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마찬가지다. (……) 변한 것들은 다 자연스러워진다. 자연스러워진 나머지 누군가 그 작은 변화를 위해 오래 싸웠다는 사실마저도 잊히곤 한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온 힘을 다해 힘들게 노력하지 않는 이상 아주 작은 것도 변하지 않는 줄을 안다.”
(김보영, 〈모든 상식적인 일들이 자연스러워지기를〉, 《오늘의 교육》 56호.)
학생인권조례는 그 ‘아주 작은 것도 잘 변하지 않는 학교’를 바꾸기 위한 연장이었으며 바람이었다. 2010년에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처음 제정됐을 때 경기도 수원시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던 나는 학교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중 지금도 기억나는 건 학생들 사이에서 ‘두발자유조례가 제정됐다더라’ 하는 식으로 소문이 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자기 중심적으로 말해 보자면, 나는 살아생전에 두발자유화만큼은 보고야 말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일에 동참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례보다는 법률이었다. 민주노동당 최순영 국회의원이 대표 발의한 ‘학생인권법안’(「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1인 시위, 거리 집회, 국회 토론회, 서명운동 등을 함께했다. 그러나 이 시도가 「초·중등교육법」에 ‘학교는 학생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라는 원칙적인 선의 조문 하나만을 성과로 얻어 낸 뒤, 우리가 만들려는 법의 형식은 ‘조례’로 변경되었다. 2008년 이후로는 교육감 후보들에게 학생인권조례를 공약으로 걸라고 요구하기 시작했고, 2009년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를 공약한 후보가 처음으로 교육감에 당선되었다.
나는 경기도교육청이 학생인권조례를 추진한다고 할 때 기초 연구 보고서 용역을 받은 연구팀에 참여했다.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경기도 조례안 개발연구」는 학생인권조례의 근거가 되는 국제법 등의 상위 법, 해외 사례,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례 등을 정리하며 학생인권조례의 초안을 제시했다. 학생참여단 운영에도 손을 보태서, 경기도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바라는 많은 학생을 만나고 소통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서명운동 등에도 힘을 보탰다. 그렇게 해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마침내 공포된 직후, 이번에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운동에 뛰어들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에 들어가, 주민발의를 위해 서울시민 8만여 명의 서명을 모으고 조례를 만들기 위해 서울 전역을 누볐다.
학생인권조례는 청소년인권운동을 하면서 처음으로 일군 제도적인 성과였고 ‘변화다운 변화’였다. 그 이전에도 운동을 통해 개별 학교들의 학칙을 개선시킨 경험은 여럿 있었다. 하지만 개별 학교 이상으로 한 광역 지자체 단위에서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최초였다. 또한, 실제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직후부터 머리카락 길이 규제라든지, 강제 야간자율학습 같은 것들은 사라지거나 감소하기 시작한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학생인권조례 시행 과정, 학교의 변화를 만드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생인권조례를 무시하고 두발·복장 관련 규정을 유지 또는 강화하려는 학교들에 맞서 싸우고 학내 시위나 서명운동 등을 함께하기도 했다. 학생들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하고 준법을 그렇게 강조하는 학교들이었지만, 엄연한 법으로 학교가 준수해야 할 학생인권조례는 제대로 안 지키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교육부는 학생인권조례 무효 소송을 걸고 법률과 시행령을 개정해 가면서 학생인권조례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고 애썼다. 서울시교육청 같은 경우는 교육감이 바뀌면서 학생인권조례를 없는 법 취급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교육청들은 대체로 학생인권조례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권단체들이 학생인권조례 홍보물을 직접 만들어 등하굣길에 배포하면서 ‘이런 건 교육청이 해야 할 일 아닌가’ 툴툴대기도 했다.
학생인권조례 운동 직후에 단체 내부에서 토론과 비판적 의견도 많았고, 지금도 고민되는 부분들은 많다.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탓에 우리의 청소년인권운동이 ‘법을 지켜라’라는 수준으로만 말하게 된 건 아닐까? 학생인권 침해를 겪은 학생에게 교육청에 신고하라고 하게 되고, 교육청이 일을 잘하나 감시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착각하게 된 순간은 없었나? 교육청이 해야 할 홍보나 교육 등을 우리가 대신 하느라 정작 해야 할 여러 일들을 소홀히 하게 된 면은 없을까? 이처럼 제도화라는 방식이나 정부 기관에 의존하게 되는 면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모두 의미 있고 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학생인권조례를 만든 것이 잘한 일이라고 확신을 갖고 답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민주주의와 학생인권의 사각지대에 머물기를 고집하던 학교에 찾아온, 아니 우리가 들이민 ‘첫 번째 변화’였다. 학생인권조례가 바꾸지 못한 것도 많지만(단적으로 조례가 처음 제정된 경기도에서도 두발자유화가 실현되진 못했다) 학생인권조례를 계기로 바뀐 것도 많고, 어떤 부분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들이라고도 생각된다. 이와 같은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진 과정에 청소년인권운동의 몫이 컸고, 따라서 이는 우리의 운동이 학교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인권조례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생인권조례는 학교를 변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고 경로였을 따름이다. 그 이전에는 교육부의 지침을 요구했고 「초·중등교육법」 개정을 요구했으며 때로는 개별 학교들과 싸웠듯이, 학생인권이 보장받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경로는 여럿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부당하게 공격받고 폐지 시도가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하고 분노스러우며 학생인권조례를 지키기 위해서도 싸우고 있지만, 그런 한편으로 또 그 다음의 운동과 투쟁을 준비하는 이유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학생인권조례 자체가 아니라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 온, 만들어 갈 변화이다. 학생인권이 당연한 상식으로 뿌리 내린 학교이고 한국 사회이다. 아마도 나는 살아생전에 대한민국 모든 학교의 두발자유화를 이루고 목격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청소년인권운동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