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이웃의 대륙(닫힌 마음의 마을) #6

1장-5: 기록하는 자 — 소녀와의 조우

by 공인멘토


가온은 폐허의 실루엣과 마주한 뒤 언덕 아래로 내려왔다. 피부에 닿은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그 목소리가 맴돌았다. "돌아가라." 그 한 마디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마치 이 세계에 새겨진 금속 활자처럼, 그의 존재를 마을 깊은 곳 어딘가에 새겨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이 침묵의 근원에 다가서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고, 무언가—아니, 누군가가 그에 대한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한 점의 생기가 눈에 들어왔다.

언덕 아래 오래된 우물 옆, 햇살이 드문드문 비치는 그늘진 공터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는 깨진 벽돌을 등받이 삼아 앉아 있었고, 무릎 위엔 낡은 나무판자와 마모된 연필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손끝은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시선은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가온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녀는 그의 접근을 알고 있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고개를 들고 가온을 바라보았고, 곧바로 다시 시선을 그림으로 돌렸다.

가온은 말없이 그녀의 옆에 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마을이야?”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린 그림에는 놀랍도록 구체적인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 마당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웃는 얼굴들,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중심엔 작고 검은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가온은 그 점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건…?”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 뒤,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말할 수 없다.

말하면 안 된다.

그녀는 소리 없는 언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가온은 그 움직임 속에서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반복된 교육과 생존의 기억을 읽었다.

그 순간, 가온의 가슴 속에서 미세한 빛이 반응했다.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려는 마음. 침묵의 그늘에 눌린 아이의 기억에 귀 기울이려는 의지. 그 의지가, 또다시 그의 안의 힘을 일깨우고 있었다.

가온은 천천히 자신의 배낭을 열고 종이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네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나도 알아야 해. 그래야 왜 이 마을이 침묵하는지 알 수 있어.”


소녀는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잠시 망설인 끝에 자신이 그리고 있던 나무판자의 뒷면을 보여주었다.

그곳엔 연필로 촘촘하게 써 내려간 기록이 있었다.

문장은 일정하지 않았고, 어떤 부분은 번져 있거나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엔 분명한 흐름이 있었다.

사람들의 이름, 사라진 가족들, 누군가가 말한 마지막 말, 마을 회관에서 벌어진 이상한 의식, 그리고 그 이후로 마을 전체가 말을 잃게 된 날의 기록.


그 기록은 짧고 불완전했지만, 강렬한 진실의 조각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복되는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그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

가온은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그 문장은 단순한 공포의 표현이 아니라, 지속되고 있는 조종의 증거였다.

그 존재는 단지 기억 속의 괴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마을의 말을 감시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존재에 의해 목소리를 잃었다.

가온은 다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엔 고통이 아닌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침묵에 순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을 기록하며, 언젠가 올 ‘말하는 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온은 느꼈다.


이 아이는 단순히 두려움을 이겨낸 자가 아니다.

그녀는 기억을 지키는 자, 그리고 봉인을 해제할 단서를 품은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가온은 그녀와 함께 잊힌 진실의 문을 열 준비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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