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이웃의 대륙(닫힌 마음의 마을) #20

4장-2: 탁기의 정화

by 공인멘토


마을 한가운데, 무너졌던 우물 근처에서부터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가슴 깊은 곳이 눌리는 듯한 위압이 퍼졌던 그곳. 하지만 이제는… 서늘한 기운 속에서도 어떤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무언가, 움직이고 있어요.”
린이 말했다. 그녀는 감정이 담긴 작은 목소리로 그 말을 꺼냈지만, 마치 새벽 안개 속에 울리는 종소리처럼 또렷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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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린과 함께 우물 곁에 섰다.
마을 사람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둥글게 서 있었고, 그 중 몇 명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제는 침묵으로는 더 이상 자신을 지킬 수 없다는 것.

가온은 조용히 말했다.
“탁기는 우리가 만들어낸 겁니다.
말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았던 수십 년의 그림자예요.”

그 말에 마을 장로 중 한 명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가엔 오래 참고 있던 물기 같은 빛이 맺혔다.

“나는… 예전에 린의 오빠를 봤소.
그 애가 소리쳤을 때, 나도 들었소.
하지만… 나는 뒤를 돌았소.”

말은 조각조각 끊겼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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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백이 끝나자, 린이 들고 있던 스케치북에서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그림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 그림 속엔 우물 위로 손을 내밀고 있는 아이와, 등을 돌리고 있는 여러 명의 어른들, 그리고 그 뒤에서 검은 기운처럼 번지는 탁한 형체가 서 있었다.

가온은 그 그림을 보고 말했다.
“저 존재는 우리 모두가 만들어낸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거라면, 우리가 다시 정화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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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우물에서 희미한 기척이 올라왔다.
검은 형체가 아니었다.
빛이 없는 실루엣이었다. 무언가가 고요하게 울고 있는 것 같은 파동.
린은 앞으로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를 잊은 건 아니었어.
말하지 못했을 뿐이야…”

그 말이 공기 중에 퍼지자, 마치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우물 가장자리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서서히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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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눈을 감고 조용히 읊조렸다.

“사고는, 사의 기운이 가득 찬 삶이 우리에게 주는 신호입니다.
탁기는, 우리가 잘못 살아왔다는 자연의 경고입니다.
그리고 지금—우리는 그 신호를 외면하지 않고,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공기 중에 무겁게 눌려 있던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이제 침묵은 무기가 아니었고,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말을 하는 것.
그것이 탁기를 정화하는 첫 번째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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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우물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저마다 고백했다.
그리움, 분노, 후회, 외면.
탁기는 그 말들 속에서 더 이상 증오로 응집되지 않았고,
조용히—서서히—공기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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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제, 우리 삶이 바뀌기 시작했네요.”

그의 말에 린이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검은 형체가 아니라, 서로를 마주보며 말하는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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