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아직도 미워하고 있다면
1절. “그 사람을 아직도 미워하고 있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데, 문득 생각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 바람도 조용했고, 일상도 평범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 사람이 떠오른 걸까.
지나간 줄 알았던 감정이, 낡은 책갈피처럼 다시 펼쳐졌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었다.
아무 의미도 없어진 관계, 다시 볼 일도 없을 사람인데도.
그 이름 석 자가 스칠 때마다, 가슴 안쪽이 쿡 하고 아팠다.
어떤 말 때문이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한데,
그때의 표정, 목소리, 무시당했다고 느꼈던 감정은 또렷했다.
그 사람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무엇이 상처였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참고, 맞추고, 이해하고… 그러다 결국 작아졌다.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삼켰고,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눌러 담았다.
그렇게 했는데도, 돌아온 건 비웃음과 무관심이었다.
그땐 몰랐다.
그게 상처였다는 것도, 내가 너무 애쓰고 있다는 것도.
그저 내가 부족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더 잘하면 될 줄 알았고, 더 참으면 언젠가 전해질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내가 화가 났던 건, 그 사람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나 자신을 지키지 못했던 나 때문이었다는 걸.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한 게 아니다.
그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싫었을 뿐이다.
2절. “그 사람이 없었다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감정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말에 흔들렸다는 건,
내 안에 ‘휘청거릴 틈’이 있었단 뜻이었다.
결국 나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안의 결핍에 무너졌던 거다.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무너지는 나, 위축되는 나, 애써 괜찮은 척하는 내가 드러났다.
칭찬에 목말라 있었고,
한 번의 무시에 속이 뒤집혔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 속에 쌓이면서
나는 점점 나답지 않은 사람이 되어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내 감정의 거울이었다.
그 사람의 말이 나를 아프게 했다는 건,
그 말속에 내가 지키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단 뜻이다.
자존감, 기대, 인정받고 싶은 마음, 거절당하는 두려움.
그 사람은 그것들을 모조리 건드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상처받고 반응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사람 없이도 삶은 흘러갔겠지만,
나는 끝까지 내 모습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미숙함, 불안정함, 감정의 버릇들을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웠던 그 사람이, 결국 나를 가장 깊이 변화시켰다.”
그 사람은 나를 망가뜨렸지만, 동시에 나를 깨웠다.
3절. “그 사람을 정리하지 않으면, 나는 자라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완전히 괜찮지 않다.
그 사람의 이름을 들으면 숨이 멎는 것 같고,
비슷한 말투만 봐도 몸이 먼저 경계한다.
감정은 끝난 줄 알았는데,
어딘가 조용히 숨어 있다가 다시 자란다.
가장 슬픈 건,
미워한다는 건 아직도 그 인연 안에 갇혀 있다는 뜻이라는 거다.
물리적 거리는 멀어졌지만,
감정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그 사람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안다.
그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계속 미워하기만 한다면 나는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그 사람을 정리하는 건,
그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인연을 나만의 언어로 다시 쓰는 일이다.
피해자로 머무는 대신, 이해하는 사람으로.
멈춰 선 채 울고 있는 대신, 걸어가는 사람으로.
감정은 없앨 수 없지만,
다르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쓴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감정을 하나씩 꺼내어
이제는 공부로 바꾸고 싶어서.
혹시 당신도 아직 미워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와 함께 천천히 들여다보자.
그 감정이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