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거짓말도 말이 되어야 한다
전화로 아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학원을 간다고 했던 열여섯 아들이 결국 가지 않았다는 소식을 학원 선생님께 전해 들었다. "아, 네. 비염이 심해서요..." 라며 능숙하게 핑계를 대더란다. 10분 전만 해도 "응, 지금 가고 있어"라고 했던 녀석이. 알고 보니 같은 학교 친구들이 모두 보강을 안 간다는 소식에 편승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화가 치밀었다. 아들의 해명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내 생각과 잔소리를 쏟아냈다. 결국 하루가 지나고, 책상 위에는 한 장의 반성문이 놓였다. 거기에 적힌 '소통'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을 멈춰 세웠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소통과 대화는 다르다고 했다. 대화는 말을 주고받는 것이지만, 소통은 그 말들을 통해 서로의 막힌 것을 뚫어가는 과정이라고. 그동안 나는 아들과 대화만 하려 했던 걸까, 소통을 하려 했던 걸까.
유아기의 아들을 키울 때면 늘 궁금했다. '저 작은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있을까?'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나가는 행동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던 날들이 많았다. 그래서 육아 서적을 뒤적이고, 유아 심리 강의를 찾아 들었다. 결국 깨달은 건, 아이는 그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단순한 진리였다.
'틀린 것'과 '다른 것'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틀린 것은 내 기준에서 벗어난 것을 오류로 보는 것이고, 다른 것은 같은 상황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이 작은 생각의 차이가 세상을 보는 눈을 바꾸어놓았다.
유아기,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지금 고등학생이 된 아들을 보며 나는 조금씩 성장했다. 누군가는 내가 무심한 엄마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저 아들이라는 '사람' 자체를 인정하기로 했다. 조금 느리고, 조금 부족하고, 여전히 아이 같은 모습 그대로를.
물론 가끔은 내 안의 욕심이 고개를 든다. 특히 시간 개념 없는 행동이나 오늘처럼 서툰 거짓말을 마주할 때면, 물 밑에 잠겨있던 나의 조급함이 폭발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내가 가진 가장 본능적인 모성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아들의 반성문을 다시 읽어본다. '소통'이라는 단어 위로 동그랗게 눌린 볼펜 자국이 보인다. 열여섯 아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대화가 아닌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짓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화를 냈지만, 어쩌면 그 서툰 거짓말 속에도 나름의 진심이 있었을지 모른다.
오늘도 나는 소통이라는 숙제를 풀어가는 중이다. 아마도 내일은, 아들의 서툰 거짓말을 듣기 전에 먼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지도 모른다. 그게 소통의 시작이니까. 완벽한 정답은 없겠지만, 조금씩 서로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 그것이 부모와 자식이 함께 풀어가야 할 영원한 숙제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