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흔드는 사람들: 성 어거스틴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에는 그가 밀라노의 길거리를 걸어가다 마주친 걸인의 이야기가 쓰여있다.
“밀라노의 어떤 거리를 지나가고 있을 때 나는 한 걸인을 보았다. 그는 농담을 하고 웃고 있었으며, 내가 보기에는 약간 취한 것 같았다. 나는 우울해졌고, 나와 함께 있던 친구들에게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기는 끝없는 슬픔에 관해 얘기했다. 우리는 갖은 노력을 다해서 아무런 걱정 없는 행복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인데, 그 걸인은 우리보다 먼저 같은 목표에 도달했고, 우리는 아예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가 행인들에게 몇 푼의 동전을 구걸하여 얻은 것, 다시 말해 잠시의 행복한 즐거움을 나는 많은 방황과 고된 노력을 통해 얻으려 하고 있었다. 분명 그의 기쁨은 진정한 기쁨은 아니었겠지만, 내가 야망을 품고 추구하던 기쁨은 더 공허한 것이었다. 어쨌든, 그는 즐거워했고 나는 걱정했고, 그는 아무런 근심도 없었지만 나는 근심투성이였다.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즐거움과 두려움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었다면 나는 "즐거움”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나에게 그 걸인처럼 되고 싶은지, 나 자신으로 남아 있고 싶은지 물었다면, 그렇게 불안하고 걱정하면서도 나는 확실히 나의 상태를 선택했을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까.” (성 어거스틴, 『참회록』 중에서)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크게 회심하고, 한 지역을 관할하는 주교가 된 성 어거스틴. 비가 오던 어느 가을, 친구와 나는 우산을 쓰고 걸으며 그의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여전히 경험이 부족했던 20대의 우리는 삶의 즐거움과 걱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당대 최고의 엘리트가, 가진 거라곤 몸뚱어리밖에 없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수준이었다. 걸인은 자기 앞을 지나는 성 어거스틴을 바라보며 ‘그래, 저 주교보다는 내가 훨씬 낫지.’라는 생각을 과연 할 수 있었을까? 우리들의 대화는 옆길로 새어 결국 지식인과 사회의 부조리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어제 오전, 우연히 이 글을 다시 읽으며 20년이 훌쩍 넘은 시간의 간격을 생각해 보았다. 이제 나는 무엇이 삶의 즐거움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준비가 되어 있는 걸까.
며칠 전 산책하다 마주친 소나무가 궁금했다. 그 육중하고 두툼한 나무가 폭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있는 모습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말 그대로 늘 푸른 솔잎을 자랑하던 나무였다. 시름시름 병충해를 앓고 있지도 않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미움을 사지도 않았거늘, 어찌하여 폭설 하나로 그렇게 힘없이 주저앉았을까. 늘 옆에 있을 땐 모르다가 사라지고서야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이 있다. 후회, 허전, 그리움…. 오늘 오후, 그런 감정에 떠밀려 다시 그곳을 가보았다.
구청에서 사람이 나와 정리했는지 통나무는 전기톱으로 팔뚝만큼씩 잘려있고 그 위로 잔가지들이 덮여있었다. 잘려진 면을 보니 아이들이 그린 동그라미처럼 나이테가 예쁘장하게 있다. 쭈그리고 앉아 나이테를 세어 보았다. 어떤 것은 촘촘히, 어떤 것은 더 넓게, 세월과 날씨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마치 지층을 동그랗게 말아 놓은 듯하다. 대략 마흔세 살. 그 세월 동안 이런 폭설쯤은 몇 번을 겪었을 텐데, 어찌하여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졌을까. 허리를 펴고 일어나 잔가지를 들춰보았다. 속이 검게 썩은 몸통이 몇 개가 드러난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한숨과 함께 ‘아…’하는 한탄이 연거푸 나왔다. 그동안 남모르게 속이 새까맣게 썩고 있었구나.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고즈넉이 서 있는 그가 부러웠건만, 그에겐 무슨 걱정과 고민이 그렇게 많았을까.
아련한 마음이 들어 통나무를 한참 바라보다 어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정갈한 옷을 입고 고뇌하고 있는 성 어거스틴은 겉은 허름하지만 속은 단단한 걸인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에겐 별 의미 없는 동전 한두 푼을 보고 즐거워 웃는 모습을 보고 그는 더 큰 재미와 쾌락을 찾아 헤매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았을 것이다. 그 이후로 시작된 많은 고뇌와 성찰에도 불구하고 삶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찾지 못했으니, 그런 자신도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발짝 더 나아가 놀랍게도 이런 자문자답을 한다. ‘그럼 너는 저 걸인의 삶을 선택할 수 있어?’ 그는 그럴 수 없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드러내기 싫은 부끄러운 속을 헤집어 꺼내놓는다.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다. 행복이란 큰 것이 아닌 지극히 작은 것에서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순간 더 큰 쪽으로 향하는 마음. 아닌 걸 알면서도 거부하지 못하는 욕심. 그의 고백은 그렇게 썩어 뭉개진 속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쓰러진 소나무 옆을 지나 다시 걸으며 발걸음을 마음으로 향해 보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났다는 것. 따뜻한 밥과 커피 한잔이 있다는 것. “안녕”하고 인사할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 어디론가 향해 갈 곳이 있다는 것. 맑은 하늘에 예쁜 구름이 있다는 것. 가끔은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동굴 속에 숨고 싶을 때 정신 차리라며 한마디 건네는 친구가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을 한푼 두푼 모으며 집까지 돌아왔다. 속이 벌써 꽉 찬 느낌이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나를 다시 흔들어 깨우며 말한다.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욕심이 자라나고, 눈 쌓인 빙판길을 불평하고,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낙담하고, 옆 사람을 탓하는 마음이 생길 거야.”
내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켜켜이 쌓인 시간 속에 묻혀있는 마음의 민낯을 바라보는 일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다. 20년이 더 흐르면 그런 일도 수월해 질려나. 아직은 그저 작은 일에 감사해야 한다는 걸 아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