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안녕, 말판씨
“만약 내일 죽게 된다면, 나는 오늘을 오늘처럼 살 것인가”.
말판 증후군(이란 것이 있었다)을 앓고 있는 소녀와 할머니, 그리고 아빠와 엄마의 이야기. 연극 ‘안녕, 말판씨’를 보았다.
반전이 많은 연극이다. 그런데 관객을 돌연 충격에 휩싸이게 만드는 거대한 반전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소소한 일상의 반전. 아니, 일상보다는 조금 쎈 반전. 그 반전에 반전이 연속된다.
죽음을 마주하지만 살짝 비껴서 있다. 죽음에 대한 덫이 곳곳에 놓여 있지만 무대 위의 누구도 덫을 밟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덕분에 죽음의 습기가 바닥 가득 하면서도 눅눅하지 않다. 오히려 상큼하고 상쾌한 연극이다.
작가의 대사 다루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다. 딱히 명대사라고 할 만한 묵직한 한방은 보이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대사들이 골고루 맛있다.
베테랑 성병숙이 양희경과 함께 59세의 시골노인(이라고 하기엔 좀) 역을 맡았다. 억센 듯하지만 어딘지 세월의 기품과 아픔을 동시에 지닌 인물 표현은 성병숙의 전공분야.
성우 출신 배우답게 대사를 정확하게 관객의 귀까지 가져다준다. 말의 울림이 다르다고나 할까. 흘리는 듯한 대사마저 명확하게 이해된다. 요런 건 성병숙만의 마법같은 재능이다.
손녀 역의 문슬아는 뮤지컬에서 먼저 봤던 배우. 그가 맡은 주소원은 감정의 폭이 넓은 배역이다. 극의 3/4 지점까지 숨겨야할 것들을 잘 지켰다.
덕분에 극이 더욱 드라마틱해졌고, 감동이 크기가 더해졌다. 극의 종반을 미소를 머금고 볼 수 있었던 것은 문슬아의 힘이 크다.
주윤발(이 이름은 좀 그렇지만) 역의 이승원. 이런 감칠 감칠한 연기는 이승원이 잘 한다. 몸도 잘 쓰는 배우다. 주윤발은 가장 단순해보였는데, 알고 보니 가장 복잡한 캐릭터였다. 이 또한 이 극의 중요한 반전으로, 이승원이 관객들이 깜쪽같이 잘 속여 주었다.
서송희는 성병숙의 친딸이기도 하다. 이전에 두 배우가 모녀로 출연하는 연극을 봤다. 그때보다 서송희의 연기가 더 세련되어졌다. “연기가 정말 재밌어”하는 듯한 느낌이 좋다. 경상도 사투리도 자연스러웠다.
다시 한번 이 연극은 묻는다. “만약 내일 죽게 된다면, 당신은 오늘을 오늘처럼 살 것입니까”.
납덩이처럼 딱딱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탄산수처럼 상쾌하지만 역하지 않게 잘 포장해 묶은 연극이다.
사진제공 ㅣ 바라이엔티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