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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로미의 김정훈 Nov 10. 2022

앨범 <ERROR>를 듣고

인생은 그것의 최고 가치와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

이 글은 앨범 해석이 아니다. 앨범을 듣고 읽으며 든 생각이다. 인생은 그것의 최고 가치와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을 좁혀가는 과정이라고. 


이번 가을 인문학을 공부하고 독서 모임을 하며 내 일상이 내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많이 멀어져 있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나의 최고 가치는 ‘헌신’인데, 대가를 기대하지 않으면서 무언가에 매진하고 싶고,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내 평소 생각과 언행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하루하루는 헌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 최고 가치와 실제 일상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인지를 하던 참이었고 이때 이찬혁의 앨범 “ERROR”를 만났다. 


이찬혁의 “ERROR”도 비슷하게 시작됐다. 과거에 그는 자신의 최고 가치를 자유와 사랑이라고 말하며 나는 그렇게 살고 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노라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 와서 만약 내가 당장 죽게 된다면 그걸 최대 가치로 생각할 것인가? 고민해보니 모순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태 살아왔던 것이 솔직한 모습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더랬고 그래서 나온 앨범이 “ERROR”라고. 


일단 먼저 나의 최고 가치를 살기 위한 조건에 관해 이야기 해보자. 예를 들어서 누군가 나에게 “아이처럼 살라”고 조언해준 덕에 나는 ‘내가 사회에 찌든 어른처럼 살고 있었구나’ 깨달으며 아이처럼 살겠노라 다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에는 무진장 넓은 틈이 하나 있는데 그 틈 사이로 보이는 건 ‘삶의 지혜’, ‘내면의 힘’, ‘나 자신에 관한 이해’ 등. 그것을 모두 충족해야만 그 틈이 좁혀져 그제서야 아이처럼 사는 하루하루를 산다. 


나는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왜 안 되는가 했더니, 남에게 퍼주다보니 내 것을 잃었고, 내 것을 잃으니 불안했다. 내면의 힘이 부족하니 불안함을 견디지 못했고, 내 것을 잃으면서도 남에게 봉사할 그릇이 부족했다. 절대 잃지 않는 내면의 ‘내 것’이 없었고, 내 것을 잃지 않으면서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지혜 역시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침반을 놓게 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게 되면서 실제 삶은 최고 가치와 더 멀어졌다. 이게 지속되면 ‘본질을 잃었다’는 상황이 찾아오는데, 아름다운 하늘을 여유롭게 보는 삶을 살기 위해 일을 하는 직장인들이 매일같이 바쁘게 출근하다보니 하늘 감상을 사치라 생각하고 위를 쳐다볼 여유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일상을 사는 것과 같은 그런 상황. 


그리고 버킷리스트. 내가 쓴 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에필로그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2020년, 군인이던 나는 생활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시간은 오후 8시 언저리였다. 읽고 있는 책은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였다. 아니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였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강렬한 경험은 확실히 기억한다. 나는 어느 구절을 읽다가 생뚱맞게 마치 내일 죽는 듯한 느낌을 경험했다. 도대체 왜 그런 감정이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순간 나는 죽음을 경험하는 것 같았다. 


단순하게 죽으면 어떨까 싶은 막연한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심지어 그 구절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왜 그런 느낌이 찾아왔는지도 모를 일이고 다시 그 경험을 해볼 수도 없었다. 


가끔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한 생각은 해봤지만 한편으로 죽음은 나와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많이 접해봤지만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갑자기 왜 그런 경험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장 오늘이 마지막 밤인 사람처럼 멍해졌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는가? 아주 짧은 순간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들었다. 


‘아직이야.’


죽음을 느끼고 있는 순간 나는 ‘아직이야’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막연했고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죽음이 찾아온 그 순간에 '아직'이라고 내 인생에게 선언한 것이다. 


'아직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 아직이야.'

그리고 그 순간 부모님이 떠올랐다. 내가 받은 것에 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한심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더라도, 꿈이 없더라도, 꿈을 찾지 않고 나다운 삶을 살지 않더라도 삶은 소중하다. 삶은 반드시 소중하다. 


그 감정이 아주 짧게 나를 강하게 누르고 사라졌다. 다시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내가 지금까지 죽음을 이론적으로만 깨닫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자기계발서를 그렇게 많이 섭렵하고 나름대로 죽음을 떠올리며 살아보자고 다짐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나는 ‘아직이야’라고 외쳤다. 누군가가 찾아와 ‘너는 내일 죽는다’라고 소리치니 ‘아직이야’라고 외친 것이다.


왜 아직이었을까. 난 내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꼭 알아내고 싶었다. 그 안에 내가 모르는 답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는 그 답을 알아내고 싶었고 끝없이 곱씹어보았다.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잠정적 결론은 있다. 생각해보건대 나는 인생을 항상 미래로 미루고 있었다. 그때는 특히 군 생활 중이었으니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책을 읽고 1분 1초를 아끼려고 했던 이유는 모두 전역 이후에 더 잘살아 보고자 했기 때문이다. 삶이 너무 소중하고 지금 순간을 즐기기 위해 책을 읽고 1분 1초를 아낀 게 아니라, 그저 전역 이후에 더 잘살아 보려고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다. 전역 후의 인생, 성공한 후의 인생을 기대하며 계속 내 인생을 미룬 것이었다. 이 역시 무의식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난 의식 중에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난 분명 의식적으로는 매 순간을 즐기기 위해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무의식에서 내가 책을 읽은 행동은 모두 미래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내가 인내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미래를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들어왔지만 무의식중에 항상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생산적인 노력들이 언젠가 찾아올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그동안 우유부단한 와중에도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미래에 도움이 될 거란 확신이었다. 도대체 그 미래가 언제인지도,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계속 미래를 위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미래에 살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다'라는 철학이 생기기 시작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즈음이었다.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라는 철학을 이제 막 세우기 시작했지만 나는 여전히 결승선을 위한 달리기만 해왔다. 나는 과정을 즐기자 마음먹으면서도 미래를 위한 달리기만 하고 있었다. 1초가 채 되지 않는 죽음의 순간이었지만 그 경험은 분명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꼈다. 



나는 당장 내일 죽는다 하니 나의 최고 가치인 ‘헌신’을 떠올리지 않았다. 물론 이 당시에 나는 아직 내 인생 최고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시기지만. 나는 지금 현재를 즐기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실제로는 전역 이후의 나의 그 자유로운 삶, 커리어적인 성공을 거두고 인정받는 삶을 무의식 중에 꿈꾸고 있었다. 나 또한 ‘버킷리스트 다 해 봐야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연스레 ‘아직이야’라고 외친 것이다. 나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거지. 문제는 그 솔직한 버킷리스트가 내 최고 가치와는 조금 동떨어져 있다는 것. 


그래서 내가 궁금한 것은 이찬혁이 가사에서 말한 ‘버킷리스트’가 그의 최고 가치와 연결된 버킷리스트냐, 아니면 단순하게 솔직한 버킷리스트냐 하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솔직한 걸까. 사실은 나도 성공하고 싶은 걸까? 내 최고 가치는 남들의 인정과 자유로운 삶일까? 그게 아니다. 아직 과거를, 아직 과거의 생각 습관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을 뿐. 그리고 나의 생각과 행동 구조를 최고 가치에 맞게 구축하지 못했을 뿐. 


나는 ‘아직이야’라고 외쳤지만 그 순간적인 외침은 ‘나는 아직 성공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어, 아직 못해본 게 많아. 나는 아직 사회의 자유로운 삶을 살아보지 못했어’가 축약된 외침이었다. 즉, 나의 버킷리스트는 실제 삶의 가치와 동떨어져 있었으니 죽기 전 떠오르는 버킷리스트 마저 나다운 버킷리스트가 아니었다. 나는 후회 마저 오류, 즉 “에러”였다. 


사실 다시금 생각하면 나의 진정한 ‘아직이야’는 ‘헌신하는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찬혁의 버킷리스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버킷리스트가 정말 나의 가치와 부합하는가?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죽기 전 떠오르는 버킷리스트. 그건 정말 나의 최고 가치와 연결되어 있는가. 아니면 최고 가치와 멀어져 버린 내 일상과 연결되어 있는가. 


버킷리스트는 어쩌면 불필요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신의 최고 가치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현재 삶이 곧 버킷리스트이기에. 그들은 놀랍게도 죽기 전 버킷리스트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을 후회없는 삶을 살고 있으니.


버킷리스트가 남았다는 그 자체가 둘 중 하나인데, 내 최고 가치대로 살고 있지만 아직 과중 중에 있는 결과물을 세상에 내지 못한 경우. 또 다른 하나는 최고 가치대로 안 살고 있으며 단지 나랑 맞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경우다. 나는 후자가 바로 솔직하지만 멍청한 버킷리스트라고 생각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최소한 나에게 있어 내가 추구하는 최고 가치대로 살고 있다면 버킷리스트는 어떤 과정에 대한 ‘부산물’에 불과하기에 이뤄지지 못하면 내가 아쉬운 게 아니라 남에게 도움을 못줘 죄송할 터. 반면 멍청한 버킷리스트는 그 자체로 목적인 경우가 많다. ‘경제적 자유’라거나 여행, 남들의 인정 등등. 그런 버킷리스트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목적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두었으니 ‘아직이야’라는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최고 가치대로 살아간 사람은 무언가 다른 ‘아직이야’가 나올 것이다. ‘아직 하고 있는 일을 다 끝마치지 못했는데’, ‘아직 사랑하는 사람과 오마카세를 먹으러 가지 못했는데’와 같은. 반면 후자의 버킷리스트는 ’아직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는데’라는 생각이 들텐데, 가장 큰 문제는 그 ‘원하는 삶’ 자체도 실제 지향하는 나의 가치가 아닌 나침반을 잃은 일상의 멀어져 버린 가짜 욕망이라는 것이다. 


실제 죽기 전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떠올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나는 충실한 삶을 살았나?’, ‘나는 사랑하며 살았던가?’와 같은 질문이 아주 짧은 순간 스쳐 지나 갔더랬다. 자신이 살아온 삶은 그러지 못했는데 죽을 위기에 처한 사고가 나니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는 것. 그래, 그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일 터. 나는 “버킷리스트 다 해봐야 해”가 아니라 이것을 떠올려야 한다. “나는 헌신하며 살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 인생의 단계는 헌신이라는 가치와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을 좁혀가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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