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고양이와 엄마노릇에 관한 체리파이적 고찰.
외할머니가 남기고 가신 파이 그릇에 거대한 체리파이를 구웠다. 냉동실에 있던 체리를 탈탈 털고, 역시나 만들어서 냉동해두었던 파이지를 밀어펴서 파이를 구웠다. 파이 구워지는 냄새는 엄청나다. 난 대낮에 베이킹을 잘 하지 않는다. 한밤중에 베이킹을 해서 잠결에도 허기가 지도록 냄새를 피우는 것은 몹쓸 버릇이기는 하지만 내 적성에 딱이다. 최소한 밤시간에는 내게 이런저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시끄럽게 구는 사람도 없다. 이때만큼 작업속도가 빠를때도 없다.
이렇게 만든 파이를 실컷 우걱우걱 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는데, 망할 놈의 아이 성적 때문에 남편이 유학을 이야기했다. 나는 한국에 흔치 않은 교육열이라고는 1도 없는 엄마에 속하고, 남편은 한국에 흔치 않은, 어쩌다 교육열이 생기는, 기러기를 자처하고자 하는 아빠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누구누구 아이는 영어유치원에 다닌다는데 우리애는? 이라는 질문은 나 아니고 남편이 했다. 나는 늘 이런 현실을 회피하는 식으로 버텨왔지만, 사실 직접 애랑 부딪히는 일은 늘 내 차지. 상담전화든, 학원 등록이든, 입씨름이든 단계와 난이도를 불문하고 전투는 내 몫.
먹어 삼킨 체리파이가 목구멍에 걸리는 순간이 왔다. 내 딸들은 극과 극의 4차원들이고, 선행학습은 먹는거냐고 묻는 애들이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계속 방해받지 않고 하고 살았으면 싶은 류의 인간인데 우리는 졸지에 어딘가 남의 대륙들을 헤매고 다니게 생겼다. 우리 집안 최강 4차원의 큰 딸래미는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 따위는 관심없으니 한국 뜨는거 대찬성이라고 외친다. 세상에 사회생활, 인간관계, 친구들하고 노는 것과 수다가 전부인 둘째 딸래미는 차라리 자기를 할머니집에 버려 달라고 했다. (교육열이 엄마보다 훨씬 쎈 할머니는 이 둘째놈 봐주다가 명단축할 생각은 없는데 왜 본인 의사는 묻지도 않는거냐고 따지지만...) 나는 분명히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앗쌀하게 즐기면서 짜릿한 인생을 살 줄 알았지만, 자식들의 성적표에 돌아버리느니 기러기 아빠와 돈버는 기계를 택하겠다는 남자와 별거 아닌 별거까지 하게 될줄은 몰랐던 거지.
난 영어를 두려워 해본적도 없고, 혼자 여행다니는 일도 두려워해 본적은 없다. 난 늘 어디든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니 두려울 것도 없으므로 온갖 해외한인 카페들을 뒤져봤다. 이러다가는 온갖 대륙을 다 누비다가 알래스카까지 갈 것 같기도 했다.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교육은 한국이 짱이죠."라고 한다. 거기라고 입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인종차별까지 이겨내려면 다시 한국 학원가서 공부하고 오세요라고 한다. 한국의 사교육 시장은 거의 파리끈끈이 같다. 한국에서 태어나 이걸 알아버린 이상 어디다 갖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학창시절에는 8학군에서 메가스터디 창립자가 된 그 유명하신 분 강의를 듣느라 새벽 두시까지 학원에 있어봤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집 점퍼살인마가 온 사방에 벗어던진 점퍼나 주우러 다니는 게 내 일상의 8할. 그럼에도 아마 죽어 묻힐때까지 나는 이 파리끈끈이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생각해보니 베이킹을 하고 글을 쓰고 뭔가를 배우고 애들 영어를 가르친다고 했었던 것 같지만, 뭐하나 이어진 일이 없다. 잊을만 하면 첫째 폭탄이, 정리되나 하면 둘째 지뢰가 터지니 불쌍한 경단녀로서는 온몸으로 흐름이 끊기는 전쟁터에 부딪혀 계속 기억상실증 걸린 사람같이 하던 일을 끊고, 끊고, 끊었다. 끊기는 것이 반복되니 내가 원래 뭘 하고 사는 사람인지 나도 모르게 되었다. 파리끈끈이 같은 한국 사교육 시장도 건져내지 못한 구제불능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애엄마다. 물론 얼마간은 육신을 어딘가에 두고 온 혼령처럼 직장에 내던져지는 월급 루팡의 노예들도 다 같은 맥락에서 마찬가지의 처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세상 어디에 간들 엄마의 본분은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주의를 요구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를 더이상 낳지 않으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짊어질지도 모르지만, 또 그렇게 짊어지다가도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빈 둥지가 되어 버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는 나를 뺀 나머지 부모들은 그런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샘솟는 화수분처럼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것 같다. 나만 돌연변이 같은건지, 아니면 어딘가에는 내 영혼의 단짝같은 동지들이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더이상 그런 동지들을 찾아 헤매는 일은 포기했다.
목에 걸린 체리파이를 커피로 밀어내리면서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이 무엇이건, 아이들에게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이외에는 중요한 것이 더 존재하지 않고,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잔소리나 간섭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는 도전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겠지. 아이들에게는 심지어 만회할 시간도 있다. 그러나 이미 끊기고 또 끊긴 흐름의 세월만으로도 나는 이미 그 시간을 다 날리고도 남았다. 평화롭게 서로가 하고 싶은대로 공존할 방법이 뭔지도 모르겠고, 또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지, 그런게 가능한 나라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어딘가로 움직이게 된다면 그건 내게 필요한 무엇이 있어서일 것이지 우리집 연쇄 점퍼살인마의 옷가지들을 주우러 다니는 일을 계속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아이가 어딘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은, 자기가 벗어던진 옷가지는 자기가 주워서 정리해 넣고 빨아입는 것이 당연해지는 순간이 온 다음일 것이다. 같은 일을 반복하기 위해 대륙을 옮겨다니고 싶지는 않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걱정은 그곳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역시나 그 곳에서도 돌연변이 같은 엄마일 것이고 한국 사교육의 파리끈끈이를 아직 떼어내지 못한 채로 방황하고 있을테니까.
결국 나는 남은 체리파이를 먹어치웠고, 목구멍에 걸린 것들을 내려보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기분이 더럽다. 사람들은 내가 뭘 원하는지 보다는 아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말해댄다. 그것은 첫째가 갓구운 고구마같은 상태로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누리기 위한 틈새의 자유를 도둑고양이처럼 찾아다닌다. 물론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아이나 가족이 부채라고 인식하는 시대를 맞았다. 태어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전까지 자기가 도둑고양이처럼 체리파이를 구워서 그걸 씹어먹다가 난데없는 유학소리에 목구멍이 막혀 죽을 뻔한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테니까. 갓구운 고구마는 이제 자라서 중2병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몰골로 돌아다니고 있지만, 그에 비해 내 삶은 갱년기가 올때까지 이렇게 있을 것 같아 좀 두렵다. 갱년기쯤 와야 미쳐 날뛰는 호르몬에 내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마구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다 쓰레기통에 쳐박아버릴 용기가 날지도 모르겠으니까.
깨달음이 넘쳐흐르는 체리파이라니. 난 그저 파이가 먹고 싶었을 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