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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ny Dec 24. 2016

프롤로그 : 벨지움을 모르는 학생

교환학생을 간다

"당신이 지원한 학교와 그 학교가 속한 나라에 가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교환학생 1차 서류 통과 후 2차 면접에서 두 번째로 받은 질문이었다.

예상했던 질문이다. 너무 반가웠다.

홍대 9번 출구 앞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땅속에서 여러 사람들 틈에서 걸어 올라오는 걸 볼 때 같은 느낌..

기다리던 것이 나타날 때 느끼는 반가움!



차분하게 술술 대답했다.

1 지망인 독일 튀빙겐 대학교는 좋아요. 나랑 잘 맞아요.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2 지망인 루뱅대학교는...

'어라?

벨기에가 영어로 뭐지?'


벨기에가 영어로 뭐지?

벨기에 말고 모든 나라 이름이 다 스쳐 지나갔다.


중국은 차이나 일본은 재팬 미국은 아메리카 영국은 브리티시 독일은 절머니

러시아는 러시아 네덜란드는 홀랜드 이탈리아는 이태리 프랑스는 프랑스 스페인은 스페인


벨기에는?


와 정말로 벨기에가 생각이 안 났다. 오죽하면 면접 보기 몇 주 전 그만둔 파리바게트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외웠던 벨기에 이름 들어간 빵 이름이 생각났다. 그 빵 이름에도 벨기에가 영어로 적힌 걸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벨기에는 영어로 정말 뭘까..?


당황해하면서 그냥 냅다 한국말이지만 영어 발음으로 굴려서 엄.. 앤 아이 띵크.. 벨긔에 이즈...라고 말해버렸다. 너무 촌스러운 나의 영어실력... 웃긴 일이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옆에 같이 면접을 보러 온 사람에게 나지막이 물어봤다.


"벨기에가 영어로 뭐죠?"

"베르지움이요."


그렇게 나는 내가 살게 되는 첫 외국, 벨기에의 영어 이름을 알았다.



교환학생에 합격한 것은 8월이었지만, 오랜 시간 고민했다.

'내가 교환학생을 가서 뭘 하지?'


선 공부,

유럽에 가서 한 학기 동안 공부를 할 생각은 없다.

한 학기 동안 학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이 적을 뿐만 아니라 사실 공부할 생각이 없다.

(나는 솔직한 한국인이다.)


그럼 여행,

그런데 6개월 동안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다. 방학이나 주말을 이용해 여행을 다니겠지.

그런데 여행이란 얼마나 피곤한 것인가?

그것도 말과 사고와 문화와 입맛이 다른 곳에서 여행이라니!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심리적으로 숨 쉬게 되는 여행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럼 친구 만들기?

나는 외국인 친구들이 그렇게 흥미로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좀 무례해 보이고 냄새날 것 같고 유행에 맞지 않는 안경이며 반팔티며 운동화며 거부감이 든다.


당연히 다녀와야지!라는 주변 친구들과 어른들과 교수님의 조언은 더 오기가 생기게 했다.

'당연히 다녀와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내가 보여주지!' 이런 오기.

그러나 남들은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것을 내치기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는 그만한 용기가 없다.



어쨌든 될 대로 되자.. 는 식으로

그리고 일단 시험 끝나고 생각하자는 식으로 교환학생에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들만 하고

(예를 들면 지금 당장 내지 않으면 니 입학과 기숙사가 취소될 것이라는 협박 메일에 적힌 것들)

모든 준비를 시험 끝난 '나'에게 유예해왔다.

시험이 끝난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여유로워서 귀찮은 일에도 화내지 않고, 여유로움이 나를 너그럽게 만들어서 과거의 내가 미루어둔 것에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시험이 끝난 나는 벨기에 대사관을 저주하고 있다.


벨기에는 아마 한국인을 홍역병 옮기는 질병 덩어리로 생각하거나, 순실한 샤머니스트로 생각하거나, 경제적으로 탄탄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하나 보다


나에게 건강진단서(무슨 각종 병균들 검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재정보증인(재정보증인도 못 믿는지 재정보증인에게 요구하는 서류도 4가지나 된다), 범죄 수사기록 서류, 입학허가서 등등 엄청나게 많은 걸 요구한다.


말하는 대사관을 본 적은 없는데, 만약 벨기에 대사관이 말을 한다면

"서류 많지? 응~ 다 가져와~ 하나라도 빼먹지 말고 공증받고 아포스티유 받아~ 너무 많지? 싫음 오지 마~"

라고 분명히 말할 거 같다.



망할 불어로 말해서 못 알아듣겠네




벨기에에 반감이 생겨서 (반벨감정), 벨기에게 흥미와 관심을 갖는다면 이깟 귀찮은 서류쯤은 의욕적으로 해결하겠지!라고 생각해서 어제 구글에 벨기에 관광지를 검색했다.

흠.. 들어본 적 없는 관광지들..

그래 여행은 다른 나라를 가면 되지!


유명한 화가들을 검색했다. 나는 그림 보는 걸 좋아한다. 외우는 건 싫어한다. 그림을 그린 사람이랑 그 사람의 성격이랑 그림이 그려진 시대나 어느 박물관에 걸려 있는지 등.. 예술을 외우는 건 예술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 나는 외우는 걸 잘못하고 그래서 싫어한다). 화가가 많았군!



네이버에서 벨기에의 역사와 문화를 봤다.

오 이건 좀 흥미롭다..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가 1516년 에스파냐의 왕위를 계승하면서 이 곳은 자동적으로 에스파냐 영토가 되었다"


 "17세기의 벨기에는 영국·프랑스·에스파냐·오스트리아 등 각국의 투쟁 무대가 되었다. 18세기 초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로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지배권을 이양하여 벨기에는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1789년 프랑스의 혁명정부군이 두 번에 걸쳐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의 영토권을 확립하였다.  "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의 싸움’에서 실패하자 같은 해 빈 회의에서 벨기에는 네덜란드에 병합하게 되었다. 그러나 1830년 8월 혁명에 의해서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1831년부터 벨기에 왕국으로서 각국으로부터 승인되고 또한 1839년의 런던회의에서 벨기에의 영세중립()이 보장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벨기에의 역사 (두산백과)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이곳저곳 뜯기고 밟힌 역사가 있다.. 짠하군

그런데 영세중립이 된 이후의 역사는 가관이다.

벨기에는 콩고와 르완다를 식민 지배한다. 당한 대로 배우는 건가.

열강에 이리저리 찢겨 본 나라는 나쁜 것부터 빨리 배우는 습성이 있나 보다. (한국이 그렇다. 미안합니다.)

내가 충격받고 국제 분쟁에 관심을 가진 계기였던 르완다 내전이 벨기에가 민족 갈등을 극에 달하게 만들어 두고는 대책 없이 떠나서 발생한 거였다니.


벨기에게 가기 싫어진다.




벨기에, 누구나 들어볼 만한 나라지만 잘 아는 나라는 아니다.


벨지움(Belgium)을 한 번에 떠올리지 못했던 건, 물론 내 얕디 얕은 영어 성적이 주원인이겠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나라라는 반증이다.


생각해보면 벨기에 사람을 본 적도 없다. (아자르, 데 브라이너, 루카쿠.. 축구선수 빼고)


익숙하지 않은, 그곳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라에 발을 들이기란,

그곳에서 6개월을 살기로 마음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꾸역꾸역 벨기에에 가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건,

사실 영화 <호빗>때문이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광팬이지만, <반지의 제왕>에서 느낀 감동을 해칠까 봐 보지 않았던 <호빗> 시리즈를 2년 반쯤 전에 봤다.


그리고 얼마 전에 다시 봤는데 그땐 그냥 지나가는 대사였지만, 지금은 지나가다가 내 마음에 뿌리를 박고 앉아버린 대사가 있다.


샤이어 마을의 호빗 '빌보 베긴스'는 대대로 전해진 그릇 등 집안 물건들과 집을 소중히 하고

책과 지도를 보면서 사는 게 낙이다.

그런 그에게 갑자기 난쟁이 원정대가 찾아오고 이 모든 일을 사주한 간달프는 빌보에게 원정대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빌보는 극구 반대하지만 간달프의 말에 빌보는 여행을 떠난다.

Gandalf: "The world is not in your books and maps. It's out there."
간달프 : 세상은 자네 책이나 지도에 있는 게 아냐. 저 밖에 있는 거라네.

Bilbo : I can't just go running out into the blue. I'm a Baggins of Bag-end"
빌보 : 무작정 저 세상으로 달려갈 수는 없어요. 난 그냥 평범한 베긴스라고요.



원정대 계약서를 읽는 빌보, 죽거나 다친다는 내용이 구구절절 적혀 있다. 빌보가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는 난쟁이들.            빌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Bilbo : I do believe you made that up.
빌보 : 당신이 다 지어낸 얘기인 줄 알았어요. (빌보 조상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Gandalf: Well, all good stories deserve embellishment. You'll have a tale or two to tell of your own when you come back.
간달프 : 좋은 이야기들은 조금씩 과장되는 법이지. 너 역시 너만의 이야기를 갖고 돌아오게 될 거야.

Bilbo : Can you promise that I will come back?
빌보: 다시 돌아올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요?

Gandalf : No. And if you do..... you will not be same
간달프 : 아니, 하지만 돌아온다면...... 예전 같지는 않을 거야.

                                                                                            출처 : http://walk_norun.blog.me/80203561255




대사를 지금 알아낼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말이 있었다.


빌보 : 손수건 있는 사람?

난쟁이 : 이걸 써 (더러운 옷 끄트머리를 찢어 던져준다.)

빌보 : (썩어가는 표정)

간달프: 손수건 따위는 잊게나. 집과 다른 많은 것들도. 샤이어의 언덕과 작은 강에 익숙하겠지만, 이젠 고향을 뒤로하고 앞에 놓인 세상을 만나게.




한국에서 적응하며 살아간 지 23년이다.

그래서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 아니 낯선 곳, 낯선 사람들이 두려워서 교환학생의 부질없음과 무용성을 핑계 삼아 나는 그저 숨고만 있었던 내 모습이 이 영화를 보면서 들켜버렸다.


더 이상 숨을 수도 없고 숨고 싶지도 않다.


그곳에서의 삶은 완전히 다르겠지. 다른 음식 다른 말 다른 사람들...

한국의 편안함과 오랜 친구를 만나는 반가움과 부모님의 따뜻함과 한국의 모든 것의 익숙함과 단절된 삶을 산다는 건 끔찍한 결정이지만, 잠시 잊어보려고 한다.


손수건도 책도, 지도도... 아무것도 진짜 세상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니까!


-프롤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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