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리야(Sigiriya)는 스리랑카 섬의 중앙에 위치한 고대 도시이다. 이곳 말로 시기리야는 '사자 바위'라는 뜻이다. 드넓은 평지에 위치한 시기리야가 한국에서 온 한 조용한 여행자에 의해 쓰이고 있는 것은 넓은 평지에 우뚝 솟은 바위 때문이다. 그 바위에서 일어난 오래전의 이야기 때문이다.
왼쪽 사진에서 가장 위쪽에 하트 마킹이 된 곳이 시기리야다. 콜롬보에서 북동쪽으로 18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Sigiriya Rock
피두랑가라 바위(Pidurangala Rock)에서 바라본 시기리야. 드넓은 평지에 솟아 오른 것은 피두랑가라 바위와 시기리야뿐이다.
내가 시기리야를 찾아오게 된 것은 1500년도 넘은 오래전에 일어난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당시 스리랑카 섬의 모리안 왕국(Moriyan dynasty)은 다투세나(Dhatusena) 왕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왕에겐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왕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모갈라나(Moggallana)였고 하나는 평민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카사파(Kashyapa)였다. 카사파는 나이가 더 많음에도 어머니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다.
473년, 왕의 호위 대장인 미가라(Migara)와 왕 사이의 불화로 인해 미가라는 복수를 꾀하고, 카사파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킨다. 카사파가 왕이 되자 다투세나 왕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미가라는 다투세나가 엄청난 보물을 숨기고 있다며 카사파가 그 보물을 빼앗게 했지만, 다투세나는 농업용 탱크 안에 둔 보물이 전부라며 가진 것이 없다 했다. 이게 격분한 카사파는 477년,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산 채로 묻어버린다.
원래 왕위 계승자였던 모갈라나 왕자는 카사파가 두려워 인도로 피신했다. 카사파는 모갈라나가 언젠가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되찾으러 올 것이란 두려움에 시달려 정신병자가 되었다. 카사파는 왕국의 수도인 아누라다하푸라(Anuradhapura)를 버리고 난공불락의 요새로 궁전을 옮긴다. 그곳이 바로 드넓은 평지에 우뚝 솟은 200m 높이의 바위, 시기리야다.
입구에서 본 시기리야. 바위 아래에도 정원 등으로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다.
시기리야 락 아래, 정원 등으로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다.
왕이 궁전을 짓고 머문 바위 아래에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몇 개의 연못이 보였고, 정원과 주거지 등으로 쓰였을 것 같았다. 시기리야는 그 자체로도 요새지만, 그 주변에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수로가 바위를 둘러싸고 있다.
<알쓸신잡 1>에서 김영하 작가는 연인들이 바위 등에 이름을 적고 사랑을 기록하는 것을 두고 '자신의 자아와 사랑이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인식되는 바위에 그것들을 적는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시기리야를 택한 카사파의 삶도 바위에 낙서한 이름 같은 것 아닐까?
시기리야 지도. 요새 방어를 위해 인공 수로를 만들어 두었다. (출처 : realworldadventures)
시기리야를 오르는 길 초입구. 저 위에서 지내면 안전하다고 믿을 만하겠구나 싶었다.
정상으로 오르는 바위 중간에는 '500명의 미녀들'이라는 프레스코 벽화가 있다. 지금은 얼마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에는 500명, 혹은 1000명의 미녀들이 바위에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이 그림들은 카사파 왕이 땅에 묻어 죽인 아버지의 원혼을 미녀들로 달래기 위해 그렸다고 한다. (그 시대엔 생각해낼 법한 발상이다.) 프레스코 벽화들을 보면서 평생동안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았을 카사파의 삶이 보였다. 자기 목숨에 관련된 수많은 걱정에 정신병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는 것도 괴로운데 일어날 일을 걱정하며 사는 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을 테다.
프레스코 벽화의 일부.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출처 : gossiplankanews)
바위로 오르는 길에 잠시 평지가 나온다. 이곳에도 무언가를 건설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리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옆엔 커다란 사자 발이 있다. 궁전으로 가는 계단은 사자의 입을 통해 가는 길이었는데 지금은 사자 얼굴은 남아있지 않고 발만 남아있다. 사자가 자신을 지켜주는 무언가가 되길 바라는 심정이었을 것 같다.
궁전으로 오르는 길에 남은 사자 발
이런 모습이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출처 : http://historydepicted.com)
사실 나는 1500년 전에 바위 위에 지은 궁전의 수준을 기대하지 않고 올라갔다. 왕의 별장 같은 느낌으로 지었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올라가서 본 그곳은 비록 흔적만 남아있지만 온전한 궁전이었다.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바위 위에서만 거의 한 시간을 보냈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곳이 왕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왕의 거처에서 바라본 궁궐
바위 위 궁전의 모든 계단과 길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왕의 공간으로 이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왕의 목욕탕 (왼쪽), Audience hall (중간), 궁전의 정원(오른쪽)
궁전 주변엔 드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끝까지 누리지 못한 바위 위 궁전의 삶
카사파가 평생을 두려워한 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쿠데타 때 인도로 도망쳤던 모갈라나 왕자는 세력을 규합해서 카사파로부터 왕위를 빼앗기 위해 시기리야로 공격해왔다. 카사파의 군대와 모갈라나의 군대는 시기리야의 평지에서 큰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 중 카사파의 군대는 카사파를 버렸다. 적에게 둘러싸이자 카사파는 허리의 단검을 높이 뽑아 자기 목을 찌르고 칼집에 단검을 넣은 뒤 죽었다고 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모갈라나는 왕이 되어 수도를 원래 자리인 아누라다하푸라로 옮기고 시기리야는 승려들에게 주었다. 이후 시기리야는 17세기까지 불교 수도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해 지는 것을 다 보고 나서야 궁전에서 내려왔다.
시기리야를 거닐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1600년 전 시기리야의 이야기는 커다란 바위 위에 지어져 지금까지 흔적이 남은 궁전만큼이나 가볍지 않다.
만약 카사파가 어머니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지 않고 왕위 계승 후보자로서 모갈라나와 하게 경쟁하다가 왕이 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왕이 호위부대장인 미가라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주었다면 쿠데타는 없었을 텐데. 카사파가 자기 안위에 대한 걱정과 불안에 떨지 않고 왕국을 잘 다스렸더라면 강한 왕권과 힘을 가졌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군사들이 자길 버리고 도망치지도 않았을 테고 모갈라나가 복수를 시도하지도 못했을 텐데.
카사파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지만, 아마 자신이 왕이 될 수 없음에 대한 불만이 아주 컸던 것 같다. 그에겐 왕이 되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꿈이나 목표가 있지 않았다. 그저 자기에겐 주어지지 않은 왕이라는 자리, 그 자체를 원했을 뿐이다. 그러니 왕이 된 이후엔 항상 살해당할 걱정과 불안에 시달려, 그저 그 왕위와 왕으로서의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바위 위에 궁전을 짓고 사는 것 밖엔 생각나지 않았을 테다. 그 불안감에 맞설 용기와 비전이 있었다면, 어쩌면 카사파도 보통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왕국을 통치하며 살다가 삶을 마감할 수도 있었을 테다. 카사파를 망친 것은 카사파가 가진 박탈감과 탐욕, 걱정과 불안감이었다.
걱정과 탐욕은 종종 우리를 괴롭힌다. 더 나은 것을 원하면서 무언가를 잃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더 나은 것을 꿈꾸는 게 모두 탐욕은 아니다. 탐욕이란 그것을 통해 이루려는 꿈이나 목표가 없이 그냥 그것을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탐욕의 대상으로 쉽게 떠올리는 것은 돈이다. 돈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게 있다면 그걸 탐욕이라 부르지 않겠지만 그냥 그 돈 자체에 매료되어 돈을 원하는 건 탐욕이다.
시기리야에서 바라본 석양
사실 카사파를 통해서 나를 보았다.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지만 걱정도 많은 사람이다. 보통 걱정이 꿈, 용기나 의욕보다 앞서서 여러 가지를 종종 포기하고 그만두는 일이 많다. 그러다 보니 최근 굉장히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나를 항상 봐준 주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동안 내가 버티고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혼자 인턴으로 나와 스리랑카에서 생활하다 보니 지금의 나는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제서야 나를 좀 되돌아보게 되었다.
4학년을 앞두면서 한 주에도 몇 번씩 갈등하며 방황하던 대학교 3학년 2학기의 나는 2018년 공기업 채용이 대폭 는다는 말에 엉뚱하게도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공기업 취직에 관심을 가졌다. 때마침 Kotra 해외 무역관 인턴 공고가 나서 지원했고, 뜻밖에도 합격해서 스리랑카 콜롬보 무역관에서 인턴 일을 했다.
그런데 나에겐 Kotra 무역관 인턴, 더 나아가 내가 관심을 가진 공기업 취직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카사파가 왕을 생각한 것처럼, 나도 그저 공기업에 취직하는 것만을 생각한 것 같다. 오랫동안 내가 간직한 꿈은 내 힘으로 어려운 사람들, 당하고 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공기업 취직으로도 물론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나는 법조인이나 기자로서 그런 일을 해내는 것을 꿈꾸었다. 이런 것을 꿈꿨을 때부터 가시밭길임을 알더라도 나는 이 길을 가야만 했다. 그런데 가시밭길이라는 말을 듣고 아예 걸어보기조차 포기했다. 그래서 나로서는 나름 (취직의 길도 굉장히 고되지만) 덜 힘들어 보이는 길을 택해 여기까지 오게 됐다. 많은 친구들이 부러워했고 축하해줬다. 이곳의 관장님과 대리님도 나를 좋게 보시고 잘 챙겨줬다.
그런데도 나는 맘이 편하지 않았다. 엄청나게 좋은 옷이지만 내 몸에 불편한 옷을 입은 느낌이 들었다. 나에겐 공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Kotra라는 타이틀이 없었더라면 내가 갑자기 무역 공기업 취직을 꿈꾸고 스리랑카 무역관으로 올 생각을 했을까? 나에겐 이 자리가 카사파 가진 탐욕과도 같다. 나에겐 공기업 취직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실패한 로스쿨 학생, 실패한 기자 준비생이 될까 두려워하는 걱정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온 나에게 코트라는 카사파의 시기리야와 같다.
시기리야를 오르는 길
고심 끝에 3월 개학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고 관장님께 말씀드렸다. 내 긴 이야기를 들으신 관장님은 거의 나를 꿰뚫어 보시고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젊은이가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나, 꿈을 잊을 거 같았나, 혹시 가다가 포기하더라도 그 길은 형곤 씨가 가야 할 길이다."
인턴을 그만두고 귀국을 결심했다.
그래서 어찌 되었든 내가 꿈꾸던 길을 가려고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내 모든 걸 쏟아서 최선을 다할 자신이 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론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걸 느껴서 불안해했다. 하지만 마음이 가는 곳에서만 최선을 다 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두려움이 없어졌다. 걱정도 없다. 그동안 많은 걱정을 안고, 그 안에서 또 내가 만들어낸 걱정과 싸우느라 힘들었던 내게, 걱정이 사라진 뒤 일상은 상쾌하다. 걱정을 안고 살기 전의 삶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지독한 감기가 나아서 숨 쉬기가 편해진 아침같다.
대상과 크기는 다르더라도 모두가 카사파처럼 걱정을 안고 산다. 그러나 걱정을 피해 숨는 것이 해결 방법이 될 수는 없다. 걱정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 대상이다. 1500년 전 시기리야의 카사파로부터 2018년의 한 여행자가 힘을 얻고 갈 길을 찾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