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 후 취직까지-6
요즘 스스로 종종 말하게 되는 마법의 문장이 생겼다.
"죽기야 하겠어?"
이 문장을 내뱉으면 취직에 대한 불안함이 많이 없어진다.
죽.기.야.하.겠.어 그 여섯 글자를 마음으로 외치며 어김없이 구인공고를 찾아본다. 지난 면접 이후로 아뜰리에출신임에도 아파트 설계를 경험했던 특이한 나의 이력으로 인해, 소규모의 아뜰리에뿐만 아니라 흔히 말하는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에도 지원을 하고 있는데 더 나아가 한국계 기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나스닥에 상장한 기업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비록 하루짜리 단기 물류 아르바이트지만 말이다.
'내가 지원하는 회사 중에 가장 큰 규모의 회사가 아닐까?' 우스갯 소리를 해본다.
쿠팡 아르바이트는 무료셔틀버스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탑승장소에 서있으면 셔틀버스가 와서 근무지로 나를 태워준다고 한다.
일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진행되는지, 무슨 앱을 깔고 어떻게 스케줄을 지원하는지, 어디서 몇 시에 셔틀버스를 타야 하는지, 탈 때 앱에서 바코드를 찍어야 하는 일하러 가기 전에 해야 하는 방법에서부터 도착했을 때 처음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공정의 일이 어떤 일을 하고 그중에서 어떤 공정의 일이 그나마 편한지, 어느 물류센터가 그나마 일이 적은 지 등 유튜브에 쿠팡알바 후기라고 치면 나오는 수많은 브이로그들이 나와서, 그런 동영상 몇 개를 보다 보면 이미 알바교육을 한 번 받은 느낌이 든다.
쿠팡알바를 몰랐을 때 이야기 듣기로는 가장 해서는 안될 아르바이트로 꼽는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데, 젊은이들이 쿠팡물류알바 브이로그 후기를 올리는 모습들을 보니 조금 용기도 생겼다. 곧 바닥날 생활비가 다 떨어지게 되면 한 달에 몇 번 정도를 나가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지 계산해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은 이러다가 취직을 영영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조금 많이 우울해져서 생활비를 아껴야 하는 상황임에도 나에게 사치라는 이름의 위로를 선물하자는 마음으로 이른 점심에 동네에 있는 브루잉 카페로 가서 7천 원이 넘는 비싼 브루잉커피를 마시러 갔다. 동네에서는 예전에 꽤나 유명한 공간인데 오픈런이라 그런지 손님은 나뿐이었다. 여느 커피보다 비싼 돈을 지불했기 때문이기도, 손님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지금은 나만을 위해 누군가가 오랫동안 정성들여 브루잉커피를 내려주고 있구나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외친 여섯 글자의 말을 계속 지켜나가려 했다. 그렇게 몇 분을 꼬박 기다려 주문했던 커피를 들고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뷰가 좋은 자리에 앉자마자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난주에는 꽤나 이름 있는 대형 건축사사무소 중 두 곳에 지원을 했는데, 그중 한 곳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면접을 보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날 이후로 브루잉카페를 갈 때마다 좋은 기억들이 생긴다는 미신 같은 생각이 들어 가끔씩 약속 없는 주말마다 동네 브루잉 커피맛집을 디깅 하곤 한다.
회사는 이름을 예전에 자주 들어봤던 곳이었다. 일반인은 몰라도, 건축을 하는 사람이면 그래도 국내에서는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회사인 것 같다. 매우 크진 않지만 하나의 건물을 거의 통으로 쓰고 있는 회사였다.
1층에는 커다란 휴게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 20분이 나의 면접시간이었으나 그곳에 아무도 없어, 면접연락이 왔던 번호로 문자를 보냈더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답을 들었다. 얼마 뒤에 1층의 휴게공간에 어느 정도 단차가 있는 곳에 있는 유리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나를 불렀다.
"혹시 kjh 씨?" 전화로만 들었던 분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면접은 시작되었다.
이곳에서의 면접은 이전까지의 면접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가장 달랐던 점은 포트폴리오의 내용을 설명하는 시간은 전혀 없었고, 포트폴리오의 내용보다는 나의 전반적인 이력을 가지고서만 진행되었다는 점이었다.
첫 질문은 역시나 다른 곳들과 비슷하게 시작했다.
"왜 이렇게 많이 쉬었어요?"
"그냥 뭐.. 여행도 오랫동안 가보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건축설계를 하지 않았을 때의 나의 이력을 다시 읽어보곤 억양 강한 부산사투리를 쓰던 전화 속에서 현실로 나온 분은 말을 이어갔다.
"나도 이런 거 jh 씨 나이에 했었는데.. 그런데 이런 게 돈이 좀 되었나요? 그동안 돈은 어떻게 벌어먹고 살았어요?"
"뭐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씩 수익이 나는 구조가 되긴 해서 그걸로 조금 유지했었고, 그전까지 모아둔 돈이랑 퇴직금을.. 전부 썼습니다."
"jh씨보면 예전에 내가 생각이나. 나도 그때 엄청 헤맸거든."
내가 모르는 미래에서 온 또 다른 내가, 과거의 나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며
지금은 미래가 불투명하고 너무 불안하지만 그래도 미래에 나는 아직 나름대로 잘 살아가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아뜰리에를 다녔는데, 합사를 해서 아파트 리모델링 설계를 엄청 했네요."
옆에 계신 딱 봐도 더 상사 같은 높은 직급일 것 같은 분이 옆에서 말했다.
"우리가 뽑으려는 사람과 프로젝트 경력상으로 일치하는군."
정말 싫어하던 아파트설계였는데, 인생에 도움이 되는 날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프로젝트들을 뭐 많이 했네요. 다녔던 회사의 규모는 어떻게 됐어요?... 그렇게 작은 규모의 회사가 어떻게 이 정도 규모의 아파트설계를 하는 회사랑 합사를 하게 될 수가 있어요?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데 여기 경력에 썼던 이 S아파트 리모델링 프로젝트.." 잠시 망설이더니 과거를 보는 것 같다고 말한 미래의 또 다른 내가 물었다.
"이거 우리 회사가 그때 경쟁사였던 건 알아요? 이거 우리 거 뺏으려고 했던 건데."
그렇다. 지금 면접을 보고 있는 회사는 사실 나의 경쟁사였다.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내가 합사를 하던 회사 H에서 S아파트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이곳에서 이른바 '뺏어서' 진행하다가, 조합과 거의 계약 직전에 턴키로 진행되던 시공사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시공사가 잘리면서 내가 합사로 속해있던 H건축사사무소도 함께 잘리게 되었다. 그렇게 1년 정도 공들였던 진행 하다가 무산되었던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것을 알고 계셨다.
"네, 듣긴 했었습니다."
"사실 아주 예전에 내가 H건축사사무소 거기 다녔었거든. 거기에 뭐 P이사 있었나?"
뭔가 인연이란 게 이런 걸까. 정말 싫어하던 아파트와 나의 건축 커리어를 꼬이게 만든 그 프로젝트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나의 멘토였던 분은 취업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내게 예전에 오랜 시간 합사를 했던 H건축사사무소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혹시 남는 자리가 있는지 물어보면서 거기에 취직을 하는 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다. 합사생활을 하던 당시에도 그런 스카우트제의가 오긴 했었지만, 의리나 이해관계를 핑계로 고사했던 일이 있다. 정확히는 그곳에서의 기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거절했었는데, 돌고 돌아서 그 당시 경쟁사로 면접을 보러 오게 되었고, 경쟁사에 있는, 나를 본인의 과거 모습에 투영해서 보고 잇는, 내 앞의 면접관은 그 H건축사사무소 출신이라니..
"네. 맞습니다. 당시에는 이사님이셨는데, 제가 같이 일하는 중에 본부장님으로 승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운명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면접을 진행하면서 마지막으로 궁금하거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말에 본인의 과거를 내게 투영하고 있는 또 다른 미래의 나라는 면접관에게, 내 나이에 느꼈던 불안함과 헤맴을 지금은 극복하셨는지, 극복했다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여쭤보고 싶었지만 너무 사담 같아질 것 같아서 물어보진 않았다.
면접을 마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전화가 다시 와서 나의 이력서에 대해 궁금했던 것이 생겨서 전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은 혹여나 나의 문제인 것 같아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이를테면 두 달만 다니고 나오게 된 이전 직장의 퇴사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일절 야근비 지급 없이 하루도 빠짐없이 12시간 이상씩 일했고, 금요일에 주말 동안 작업해야 가져갈만한 일들을 요구하며 주말출근을 은근히 강요하고 5명 이상의 규모임에도 개인연차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 대신에 근로기준법 관련이라고 적은 것에 대해.
친구는 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이유 같은 항목은 아무리 그게 사실이어도 그런 식으로 적으면 절대 안 된다고 나를 매우 혼냈지만, 그것보다 더 좋게 적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뒤에 합격연락을 받게 되었다. 팀원들도 너무 좋고 내 또래들이 많아서 즐거웠다. 회사는 8시간의 근무시간이 지나면 따로 야근신청을 하지 않는 경우 컴퓨터가 저절로 꺼졌다. 첫 본부회의에서 부사장님과 본부장님께서는 새로 온 나와 내 동기를 소개하며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다른 직원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기도 했다. 처음 느껴보는 회사에 대한 소속감에 조금 감동까지 받은 날 저녁에, 집에서 샤워를 하려고 했을 때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이 회사의 합격소식을 받기 한 달 전에 내가 공고를 보자마자 너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날 밤을 새워서 지원서를 작성했었던 공간 브랜딩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안녕하세요. kjh 씨죠? 아 여기 T회사인데요.. 혹시 면접을 좀 볼 수 있을까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