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 후 취직까지-5
나는 5인이하의 소규모 건축사사무소에서만 직장생활을 경험하다 보니, 아직까지 계속 소규모 사무실에만 입사지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경력은 소규모 사무실에서 원하는 인재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소속은 소규모 아뜰리에였지만 내가 해왔던 프로젝트들은 대형 건축사사무소에서 하는 프로젝트에 훨씬 가까웠다. 규모가 적당히 작고 집에서 가까운 곳들만 지원해 왔지만 그런 곳의 공고가 잘 올라오지도 않아서 우선 규모에 대한 조건은 포기하기로 하고 공고글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날과 다름없이 공고를 뒤적거리고 있었던 중에 새로 올라온 직원이 250여 명 규모의 회사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30분 자기계발시간 5시 퇴근, 야근 없고 정시퇴근, 경조사비 지원, 연차 적극권장, 초과근무 시 대체휴가적용..
매일 12시간 이상 야근비 없이 근무해 오던 내게 도대체 이런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회사의 위치도 검색해 보니 3-4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 좋았다. 하루하루 전쟁터에서 사는 삶이 아니라 티비에서 보는 직장인들처럼 저녁 있는 건축인의 삶이 궁금하다는 단순한 호기심에 지원서를 넣으려 했다. 하지만 경력 5년 차 이상의 경력자를 구한다는 조건이 박혀있었다.
나는 그 조건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뭐 그게 어때서? 어차피 지원하는 게 돈이 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메일에 비록 만으로 3년 4개월의 경력만 가지고 있지만 관심이 있어 지원한다는 글과 함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메일로 보냈다.
다음날 오전에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5년 차 이상을 구한다는 회사의 면접연락이었다. 5년 차 이상을 구하지만 4년 차 초반임에도 면접까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내 포트폴리오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면접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바로 다음날 오전 면접이었다. 큰 건물의 한 층을 전부 쓰는 회사에는 처음 들어가 보았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안내데스크였다. 건축사사무소에서 설계를 하지 않는 직원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면접을 보러 왔다고 데스크에 말하자 회의실로 안내해 주셨다. 2-3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이었다. 그곳까지 가는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복도를 걸어가면서 마주치는 저연차 직원 같아 보이는 분들이 내가 다른 팀의 직원인 줄 아는지 고개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이후 두 분이 들어오셨는데, 한분은 내게 전화를 주셨던 분이 대표님이셨고, 본부장님이라는 또 다른 한분, 나까지 셋이서 면접을 시작했다. 그렇게 내 포트폴리오에 대한 발표를 시작했고 발표를 마친 뒤 대표는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결국 그림만 그리다 온 거네요?"
경력이 3년이나 있음에도 실시도면을 그려본 적이 없다는 말을 그리 표현한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내가 회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하고 싶어도 실시도면을 그릴 기회가 없었는데, 그게 내 탓인 것처럼 구박받는 것 같아 조금 억울하기도 했다. 내가 남들에 비해 조금 프로젝트 운이 안 좋았던 것뿐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가지고 왜 안 했냐고 말하는 것이 조금 치사하다고 생각되었다.
"뭐, 그런 셈이죠."라고 답했다. 대표는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kjh 씨는 아시다시피 저희가 낸 공고에 조건이 부합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학부 포트폴리오를 보고 좀 흥미가 생겨서 직접 전화로 면접을 요청한 거긴 해요. 내가 지금 걱정되는 것은 여기는 그래도 규모가 있는 회사다 보니 우선 나이가 경력에 비해 많아서 그 무리들 안에서 잘 어울릴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있고, 우리는 원래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중에 실시를 빨리 쳐낼 사람이 필요해서 구인을 한 건데, 그에 대한 경력이 아예 없다고 하니까.. 그 두 가지가 걱정입니다."
"실시도면을 그릴 프로젝트를 경험하지 못한 건 제가 프로젝트 운이 조금 없을 뿐이라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애초에 대입도 늦어서 1학년때부터 동기들과 3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났는데, 여동생도 같은 터울이다 보니 나이에 대한 허들은 크게 느끼지 못했고 4학년 때 학생회 생활도 하면서 학우들과도 큰 문제없이 졸업했습니다. 그 부분은 제입장에서는 크게 걱정이 되진 않습니다." 대표는 나를 보며 최후의 질문을 날렸다.
"그러면 우리 회사가 kjh 씨를 꼭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몰아붙이는 다른 여러 질문들은 참아왔지만 그 질문을 듣고 나서는 바로 '없는데요.'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랫동안 전회사에서 공들이며 진행하던, 시공사와 턴키로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시공사의 문제로 무산되면서 경력은 3년이나 되지만 실시도면도 제대로 다뤄보지 못한 아뜰리에 출신의, 심지어 대입도 늦고 갭이어도 보내서 나이도 같은 경력에 비해 더 많은 구직자를 뽑으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문은 조금 멍청한 질문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대체 세상에 그딴 이유가 어디 있냐, 잘 알지도 못하는 회사가 나를 직원으로 뽑아야 하는 이유를 내가 어떻게 알겠냐는 말이다. 심지어 내가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도 없는데, 거기서 나를 꼭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마음속에서 이런 말들이 소용돌이치며 입밖으로 올라올 것만 같았지만, 겉으로는 그냥 실실 웃으면서
"하하.. 글쎄요.." 하며 질문에 대한 답을 넘겼다.
옆에 있던 본부장님은 이 회사는 정말 안정적이고 오래 다닌 사람들도 그만큼 많다는 이야기와 함께 회사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했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멘탈이 굉장히 좋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는데 앞선 회사의 좋은 점들과는 굉장히 모순적이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좋은 회사인데 왜 멘탈이 좋아야 하지..?' 대표도 그 말을 듣더니 그쪽 팀에 누가 그렇게 직원들을 괴롭히냐는 농담을 하며 껄껄 웃었다.
아무튼 그렇게 혼난 기분이 든 면접을 마친 뒤에 집으로 돌아가면서 작은 회사든 큰 회사든 면접이라는 것이 나의 건축경력이 물경력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일종의 인증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면접에서 그렇게 탈탈 털어놓고 내가 설령 뽑힌다 한들, 너덜너덜한 채로 이 회사에 들어가면 과연 설레는 좋은 마음으로 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국내 유명 대형설계사무소에 재직 중인 친구에게 그날 면접에서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 토로하니 원래 기죽이고 연봉 깎고 경력 낮춰서 계약하려고 오히려 대형설계사무소들이 그러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말을 들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번에도 불합격이었다. 면접당시 대표옆에 있던 본부장에게 담백한 불합격 문자가 왔다.
s건축 s본부장입니다.
먼저 귀사의 면접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부 협의를 통하여 귀하와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통보해 드립니다.
귀사에 대한 관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떨어졌다는 통보보다 면접에서 느낀 상처가 더 큰 면접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소속되었던 회사의 규모는 작았기 때문에 당연히 여태까지 작은 규모의 회사에만 지원했었는데, 내가 직접 경험했던 프로젝트들은 큰 회사에서도 어쨌거나 충분히 경쟁력이 있는 포트폴리오일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며 한주를 보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