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이어 후 취직까지-4
P건축사사무소의 숨 막히는 면접을 보고 나서 한 달이 지났다.
그사이 어떠한 곳에서도 면접연락은 오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계속 진행하고 있던 '건축설계는 아닌 건축 프로젝트'의 마무리 작업을 하느라, 취업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면접연락이 오지 않은 이유에 크게 한몫하고 있었다. 한 달 동안 겨우 두어 곳에 지원을 한 게 전부였다.
다행히 어찌어찌 (평생부업이 될 수도 있을)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한 지 2주가 되었다. 다행히 프로젝트에 대한 참여자분들의 반응이 매우 좋아서 보람찼다. 하지만 거의 한달 내내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전부 프로젝트에 시간을 쏟느라, 몸은 많이 지쳐있었고 이제 다시 또 취준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심적으로는 많이 불안한 상태였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지난주부터 다시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던 와중에 프로젝트의 PM이란 이유로 쫑파티에 참여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솔직히 심적으로도 금전적으로도 부담되는 자리였지만 어쩔 수 없이 약속장소로 가고 있었다. 약속장소 근처에 도착하여 핸드폰을 봤는데,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평상시에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절대 받지 않는데, 취준생활을 하면서 모르는 번호만큼 반가운 번호도 잘 없는 것 같다. 혹시 몰라서 구글에 부재중 번호를 검색해 보니 내가 지난주에 지원했던 두어 곳 중 한 곳인 r건축사사무소의 번호였다. 조금 늦은 저녁이었지만 얼른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kjh라고 합니다. 부재중 전화가 걸려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여기는 r건축사사무소입니다. 혹시 아직 구직 중이시면 다음 주 화요일에 면접을 보실 수 있으실까 해서요."
"네! 가능합니다."
"혹시 재직 중이신가요?"
"아.. 아니요."
"아, 그러면 제가 지금 사무실이 아니라서, 다음 주 월요일 아침에 면접일정을 문자로 보내드려도 될까요? 우선 화요일에 면접을 보려고 하는데 시간은 다 괜찮으신가요? 그러면 정확한 면접시간은 월요일 아침에 보내드릴게요. 그날 뵙겠습니다."
그렇게 내일 면접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겠다는 연락을 받고 마음이 조금은 편하게 쫑파티를 가게 되었다. 오랜 백수생활로 돈도 별로 없는 주제에 한 달 만에 면접연락을 받아서 기분이 좋아 2차로 맥주까지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주 월요일 오후에 문자가 한통 와있었다.
안녕하세요. (주) r건축사사무소입니다.
내일 r월 r일 화요일 오후 5시 면접 일정 확인드립니다.
주소는 서울시 강남구 r빌딩 r호입니다.
사실 재직 중이냐고 묻는 말이 전화를 받았을 당시에는 조금 부정적이게 다가왔었다. 내가 사람을 뽑는다면 백수인 상태의 사람보다는 재직 중이지만 우리 회사에 오고 싶어서 지원한 사람을 뽑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봤었는데 이후에 다시 생각해 보니 재직 중이 아니라면 면접시간을 6시 이전에 잡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회사입장에서 원하는 날짜에 바로 합류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히려 재직 중이 아닌 지원자가 회사입장에서는 더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처럼 오랫동안 백수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게 월요일에 면접일정 문자를 받고 바로 다음날인 화요일에 찾아간 사무실은 강남구에 있는 작은 빌딩건물 안에 있는 곳이었다. 걸어 올라가기에는 좀 높은 층수였는데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이었다. 인원은 4-5인정도 되는 규모였지만 하얗고 깨끗한 분위기의 사무실이었다. 회의실은 유리벽으로 막힌 곳이었다. 그곳에서 실세인 것 같은 여성 직원분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들어갔다. 이후 r건축사사무소의 소장님과 회의실로 안내해 주셨던 여성분과 함께 면접을 진행했다.
포트폴리오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며 그 프로젝트에서 내가 전담했던 일들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평가는 꽤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질문이 있느냐는 말에 몇 명 정도가 지원했는지 또 내가 몇 번째 면접자인지를 여쭤보았는데, 30여 명 정도가 지원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면접자가 몇 명인지까지는 말하기 조금 곤란하다는 입장이었다. 내가 이 질문을 할 때마다 보통 30-40명 정도의 지원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요즘 정말 취업하기 어렵구나라는 걱정스런 마음과 동시에 그래도 가끔씩은 이렇게 면접은 볼 수 있구나라는 생각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함께 들었다. 비록 번번이 면접에서 낙방하고 있지만 지원자가 몇 명이었는지 물어봤을 때 몇 명이 지원했다고 말하는 면접관의 대답이 힘든 취업활동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후 내가 입사하게 되면 할 일에 대해 물어보었다. 당장 한 달 뒤 제출해야 할 현상설계 작업들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들이 최근에 진행한 현상설계 패널들을 보여주며, 이 정도 퀄리티의 3d모델링 작업을 할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았다. 복잡한 비정형만 아니라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본인들은 심플하고 깔끔한 디자인을 추구해서 지금 보여준 사례정도의 형태라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비정형을 쓸 일은 잘 없다고 말씀해 주셨다.
소장님은 우선 물어보고 싶은 모든 질문을 마치셨다는 말을 했고, 옆에 계신 여성 직원분께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냐고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이 들어왔다.
"혹시 평소에 일을 하는 스타일이 느리지만 좀 꼼꼼하게 챙기면서 하는 스타일이세요? 아니면 빠르지만 좀 빠뜨리거나 놓치는 덜렁대는 스타일이세요?"
처음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밸런스 게임 형식의 질문이라니. 심지어 둘 다 부정적으로 들렸다.
이 질문은 얼핏 보면 느리지만 꼼꼼한 성격이 더 좋아 보일 수 있겠지만, 이런 작은 사무소를 다녀본 나에게는 이 정도 규모의 회사에 다니면서 느리다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현상설계 공모를 위주로 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마감시간을 지켜야 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덕목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 고민을 하면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다시 재질문이 들어왔다.
"질문이 좀 이상할 수 있긴 해요. 그저 보다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를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 말을 듣고 나서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이 들어서
"굳이 말하면 후자 쪽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면접관인 두 분은 서로 눈을 마주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웃으며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저희가 좀 꼼꼼하게 챙기는 성격인 편이라 빠르게 일을 치고 나가는 성격을 선호해요. 그런 스타일을 오히려 더 선호해서 혹시나 어떤 쪽인지 물어본 거예요. 일을 해보니까 좀 빠뜨리는 게 있어도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가는 성격을 가진 직원분들이랑 좀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챙기는 건 우리가 하면 되거든요. 꼼꼼한 사람들만 모이게 되면 굉장히 답답하더라고요."
덜렁대는 성격이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는 이전에 나가게 된 직원분의 퇴사이유를 여쭤보았다. 대학원을 가게 되어 나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내게도 대학원 진학이나 유학에 대한 계획이 있는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어보셨다.
그리고 이런저런 회사의 복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요약하자면 자신들은 법대로 한다는 말이었다. 법대로.. 너무 좋은 말이었다. 전에 다닌 회사는 법을 지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어떤 법을 지켰는지를 찾는 것이 더 쉬울 정도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혹시 언제부터 다닐 수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언제부터 다닐 수 있는지'라는 질문은 면접에서 굉장히 긍정적인 질문이다. 그 순간 머리로는 바로 내일부터 다닐 수 있다고 말하라고 했지만 프로젝트로 인해 한동안 지친 마음을 조금은 달래고 싶은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에 입술 끝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은 다음 주로 바뀌어 나왔다.
"음, 다음 주부터는 바로 다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번 주 안에 저희가 합격여부 문자를 꼭 드리겠습니다. 이건 오시느라 고생하셨다는 의미에서 교통비만 넣었어요. 얼마 되진 않지만."
아뜰리에 면접에서 면접비를 받아본 건 또 처음이었다. 금액보다도 면접비를 주는 마음 자체에 감동을 받았다. 진짜 여기는 준법정신이 좋은 회사일 것 같다는 신뢰감도 들었다. 이곳은 이전까지 내가 본 면접 중에서는 가장 대화도 편했고, 느낌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틀 뒤에 날아온 문자는 불합격을 알리는 문자였다.
안녕하세요 r건축사사무소입니다.
저희 회사에 관심 가져주시고 입사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귀하의 뛰어난 역량과 프로필에도 합격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해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출해 주신 개인정보는 모두 안전하게 폐기할 것을 약속드리며 원하시는 곳에
좋은 인연을 맺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내가 어떤 부분을 놓친 걸까?라는 생각에 올라왔던 공고글을 다시 보았다.
회사에서 올린 희망근무날짜 옆에는 '즉시'라는 말이 쓰여있었다.
생각해 보니 한 달 뒤가 공모전 마감인데, 백수인 주제에 일주일 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보면 조금 달가워 보이진 않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불합격이 결정된 건 아닐 수 있겠지만 말이다. 빠른 건 아직 증명하진 못했지만 어쨌거나 공고에 올라온 희망근무날짜를 놓쳐 덜렁거린다는 성격은 여실히 증명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