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양 감독의 <공포분자>를 2년 만에 다시 봤다. 영화 전반적으로 깔린 우울한 정서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예전과는 다른 감상의 변화가 있었다. 먼저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영화 자체가 정적이고 숏의 구성도 불친절해 서사 또한 난해하다고 느껴졌었다. 영화를 다시 보니 정적인 분위기와 일부 모더니즘스러운 숏들이 있긴 했는데 서사가 난해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인물별로 놓고 보면 크게 이해하기 어려울 것 없는 선형적인 서사구조이다. 과거 모종의 이유로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두 번째로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감상을 생각해보면 나는 과장 진급을 노리는 의사 ‘이립중’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각자의 도피처를 찾아 그곳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립중 또한 위안을 얻기 위한 시도를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공포분자(테러리스트)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영화를 다시 보니 과연 나머지 인물들이 위안을 얻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립중의 아내이자 소설이 공모전에서 1등을 하며 정식 작가가 된 ‘주울분’은 항상 불안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삶에 권태나 난관이 찾아올 때마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새로운 시도를 시작한다. 새로운 것은 익숙한 것과 달리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에 항상 불안함을 동반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 위안과 안정을 얻은 듯 보이는 그녀의 삶은 어쩌면 영화 말미의 헛구역질로 그 허례허식을 토해낸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는 ‘소강’은 다시 전 여자 친구의 품으로 돌아가 위안을 얻은 듯 보이지만, 이는 피할 수 없이 날아오는 입영통지서처럼 어쩔 수 없이 돌아간 것에 가깝다. ‘숙안’에게 꽂혀 집을 떠나 방황했고 그녀와 재회하는 데 성공했지만, 숙안을 붙잡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숙안은 어떤가? 남자 친구인 ‘대숙’과 다시 만나는 데 성공했지만, 그녀의 삶은 위안과 거리가 멀다. 매춘을 가장한 범죄로 하루하루 먹고사는 불안한 삶이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도피처로 돌아가기 전의 삶보다는 일견 안정되어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그곳에서도 고립된 개체에 불과하고 여전히 불안과 공허, 우울과 싸우고 있는 공포분자이다. 결국, 이 영화 속 도시의 삶에는 평화와 안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포분자>에서 간단히 살펴볼 장면은 영화 러닝타임상 1시간 8분 11초부터 1시간 15분 50초까지 총 7분 39초간 벌어지는 소강과 숙안의 재회 씬이다. 매춘하는 척 남자를 데려와 돈을 훔쳐 달아나려 했지만, 일이 꼬이게 되어 지니던 칼로 남자를 찌르고 도망친 숙안은 과거 안식처였던 도박장으로 돌아간다. 그곳엔 그녀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강이 살고 있었고 영화 시작 이후 1시간 만에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1 도박장을 찾아온 숙안(지속시간 64s)
사진 1, 2 (순서대로)
도박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보여주고 있다(사진 1). 고정된 카메라가 배경만 잡고 있고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몸이 안 좋은 숙안의 기침 소리는 계속 들리므로 이곳에 숙안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숏이 넘어가 문을 비추고 열쇠로 문을 열려고 하는 숙안의 손이 프레임 인(frame in) 된다(사진 2). 문을 여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영화 내내 손목에 걸고 다니던 열쇠가 바로 아지트였던 도박장 열쇠라는 것이 처음 밝혀지는 숏이기도 하다.
사진 3, 4
전에 도박장이었던 곳은 소강이 이곳에 살게 되면서 창문을 검은 종이로 막은 암실로 변해있다. 그래서 암전 된 상태에서 열린 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에 의존하고 있다(사진 3). 숙안이 들어오고 이동하면서 문에서 멀어지자 패닝 된 화면은 다시 암전 된다. 암전 된 상황 속에서도 숙안의 기침 소리와 숨소리가 들린다. 숙안이 불을 켜자 벽 한쪽을 자리 잡은 거대한 숙안의 사진이 프레임 중앙에 나타난다(사진 4). 사진을 처음 본 숙안이 충격에 쓰러지고 이때 구석에 있던 소강이 프레임 인으로 들어오고 다시 화면은 암전 된다. 이번 암전은 컷 전환을 의미하는 암전이다. 세피아 톤의 조명과 후경의 거대한 숙안의 사진 그리고 검은 그림자로 전경에 배치된 인물 모습의 대비가 세련된 느낌을 주는 장면이었다.
#2 간호하는 소강, 깨어난 숙안. 대화 시작(83s)
사진 5, 6
암전이 풀리면 누워서 앓고 있는 숙안이 프레임에 나타난다. 그리고 수건을 든 소강의 손이 프레임 인 된다(사진 5). 다음 숏에서 숙안이 깨어나길 기다리며 책을 보는 소강의 모습을 보여준다(사진 6). 이 이어지는 두 숏을 통해 상황뿐 아니라 인물들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다. 소강이 앉은 뒤편 벽에 앞서 사진 4에서 보았던 거대한 숙안의 사진 일부분이 보인다. 그 밑에 앉아서 반대편을 응시하고 있기에 문과 가까운 쪽엔 소강이 반대편 벽에는 숙안이 누워있을 거라는 공간적 추측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사진 6을 통해 방안을 비추는 전등이 없이 램프 조명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주변을 은은하게 비추는 램프 조명의 활용으로 숏이 전반적으로 고즈넉하고 따뜻한 느낌이 든다.
사진 7, 8
이어서 컷이 전환되고 사진 4처럼 거대한 숙안 사진을 보여준다. 그리고 소강의 보이스가 깔린다. 아직은 이게 대화인지 내레이션인지 분간할 수 없다. 또 한 번 컷이 전환되고 숙안이 어느새 깨어나 앉아있는 모습을 보여준다(사진 7). 이를 통해 계속 깔리는 보이스가 소강의 내레이션이나 혼잣말이 아닌 숙안에게 하는 대화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숙안은 소강이 준 것으로 추정되는 식음료를 손에 들고 있다. 방금 막 깨어난 것은 아니고 조금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카메라는 계속 숙안을 비추고 있는데 보이스는 계속 소강의 것이다. 소강이 말을 할 때 숙안은 계속 먹고 있다. 이어서 카메라는 뒤로 빠져 인물이 모두 나오는 롱 숏을 보여준다(사진 8). 프레임 양 끝에 인물들이 앉아있고 공백은 모두 어둠으로 채워졌다. 전체적인 공간의 모습과 두 인물이 아직은 거리감이 좀 있는 어색한 상태임을 느낄 수 있다. 사진 8과 같은 투숏의 구도가 되고 나서야 소강의 대사에 대한 숙안의 첫 리액션(대답)도 등장한다.
#3 카메라에 관심 보이는 숙안. 거리감을 좁히는 둘(59s)
사진 9 , 10
숙안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옆에 있던 카메라에 관심을 보이는 듯한 숏이 이어진다. 이때 보이는 방식이 다소 특이하다. 소강은 계속 말을 하는 상태에서 사진 8에서 컷이 전환된다. 숙안 옆에 있는 카메라가 든 바구니가 클로즈업된 채로 나온다. 그러다 숙안의 손이 카메라를 향하고 그중에 하나를 들어 올리면서 무생물인 카메라 바구니를 프레임 중앙에 놓고 보여주던 숏에 의미가 형성된다(사진 9, 10).
사진 11, 12
그리고 컷이 소강의 단독 숏으로 전환된다(사진 11). 숙안이 카메라를 만지고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관련된 질문이 나오고 지금 있는 공간에 대해서도 궁금해한다. 이번에는 주로 질문하고 말하는 쪽이 숙안인데 카메라는 소강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소강이 말할 때 숙안을 비추던 사진 7의 상황과 정반대이다. 숙안의 질문을 통해 지금 있는 장소도 사진과 관련된 암실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둘은 내기를 한다.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암실 안에서 과연 밖이 낮일지 밤일지에 대한 내기이다. 하지만 사진 12처럼 밖은 애매한 해 질 무렵 저녁이었고 승자는 없었다. 이 내기의 결과를 보여주는 방식도 특이하다. 사진 11에서 ‘내기하자’라는 말과 함께 사진 12로 컷이 전환된다. 그다음 창을 가린 종이를 뜯어내고 창문을 여는 사운드가 들리고 둘이 서로에게 ‘네가 (내기에서) 졌다’라고 이야기하는 말소리가 이어서 들린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사진 11에서 소강이 일어나고 숙안도 합류하면서 둘이 같이 창을 열고 밖을 확인하는 모습들을 한 숏 내지 여러 숏으로 나눠 보여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선 밖을 관객이 먼저 확인하고 그다음 인물들이 확인하는 것은 사운드로만 들려준다. 사진 12는 객관적인 숏이었다가 인물들이 창을 열고 밖을 보는 순간에 주관적인 숏(시점 숏)으로 변화한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이 보여주려 했던 영화에서의 자유간접화법의 실현을 연상케 한다. #2, #3에서 언급한 이런 특징들을 보면 에드워드 양 감독이 1960년대 태동한 모더니즘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다소 불친절하고 선형적인 서사인데도 혼란함을 느꼈던 건 영화가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소격 효과를 주는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4 사랑을 나누는 숙안과 소강(39s)
사진 13, 14
내기 이후 컷이 전환된다. 사진 13에 숙안이 혼자 서있다가 소강이 왼쪽 앞에서 프레임 인 하고 들어오며 사진 14와 같은 구도가 된다. 내기 이후 사이가 가까워진 두 사람은 계속 키스를 한다. 그리고 사진 14에서 소강의 보이스오버가 깔린다. 붉은 조명은 암실에서 사진 작업할 때 사용하는 조명을 연상케 한다.
#5 카메라를 들고 도망치는 숙안(17s)
사진 15, 16
이후 컷이 전환되며 누워있는 소강의 모습이 보인다. 중간 과정은 전부 생략되어있기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둘이 사랑을 나눴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누워있는 소강의 정지된 이미지에 뭔가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하는 사운드가 들린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어두웠던 소강의 몸 위에 한 줄기 빛이 비친다(사진 15). 정황상 숙안이 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이처럼 모든 상황을 이미지로 친절하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설명은 배제되고 이미지와 오디오가 따로 놀기도 한다. 이어지는 컷에서 사진 9와 달리 비어 있는 카메라 바구니를 보여준다(사진 16). 숙안이 카메라를 챙겨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빛이 사라진다.
#6 카메라를 팔러 온 숙안(68s)
사진 17, 18
숙안은 지인인 형제에게 카메라를 팔러 왔다. 그중 형이 카메라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사진 17). 숙안은 이 장면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지만, 형의 대사를 통해 카메라를 판 자금으로 어딘가로 도망칠 계획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진 19, 20
이어서 컷 전환이 되고 형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기만 하던 동생이 처음 등장한다(사진 19). 동생은 영화 초반 경찰에게 붙잡힌 숙안의 남자 친구인 대숙이 풀려났다는 고급 정보를 제공한다. 이에 초점 없는 눈으로 형을 응시하던 숙안이 또렷한 눈으로 동생을 응시하고 있다(사진 20). 카메라도 사진 18의 웨이스트 숏에서 더 클로즈업해 미디엄 숏 정도로 잡고 있다. 대숙의 풀려남은 숙안에게 중요한 정보이기에 강조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7 카메라를 돌려주고 사라지는 숙안(129s)
사진 21, 22
사진 15에서 좀 더 클로즈업된 화면에서 여전히 소강은 자고 있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먼저 틸트 업을 하더니 이어서 소강이 잠에서 깨서 일어나 상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컷이 전환되고 걸어가는 소강의 다리를 잡아준다. 그리고 문을 여니 그곳엔 숙안이 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카메라 가방이 놓여있다(사진 21). 먼저 틸트 업한 후에 소강이 일어나는 것이나 애초부터 소강의 다리를 잡아주는 카메라는 마치 촬영하는 카메라가 모든 사건의 전개를 알고 있는 전지적 시점에 따른 움직임을 보여준다. 행위가 발생한 후에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행위 이전에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 또한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소강이 다가가 가방을 열고 카메라를 꺼낸다. 이때 화면은 카메라를 꺼내는 소강의 손을 따라 틸트 업한다(사진 22). 이렇게 행위가 발생하고 카메라가 움직이는 것이 고전적인 영화 문법에 가깝다.
사진 23, 24
소강은 창문 근처로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고(사진 23), 컷이 전환되며 대숙과 만난 숙안이 대숙의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지는 숏이 이어진다(사진 24). 숏과 숏의 관계를 생각하면 흐름상 자연스러운 부분이지만, 사진 24의 숏이 사진 23의 소강과 연결되는 시점 숏인가를 생각해보면 애매한 부분이 있다.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지는 숏이 시작할 때 처음엔 오토바이를 탄 채 숙안을 기다리는 대숙의 모습만 보여주고 아래에서부터 숙안이 프레임 인 되며 들어온다. 이 숏이 만약 소강의 시점 숏이었다면 움직이는 숙안을 따라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사진 25, 26
사랑했던 숙안이 떠나고 소강 역시 더는 암실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방을 가리던 검은 종이들을 떼어내고 창문을 연다(사진 25). 그리고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오며 거대한 숙안 사진이 제멋대로 위태하게 흔들린다(사진 26). 소강의 사랑이 바람에 날리듯 사라져 버렸다는 걸 상징한다. 더불어 바람에 의해 분절된 숙안의 얼굴은 기괴하면서도 아련한 느낌이 들게 한다. 참으로 모더니즘적인 이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