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스터

by 구찬우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잠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어제의 장면이 파도처럼 되살아났다.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어딘가 장성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세수를 하는 동안조차 얼굴에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히 달랐다.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달랐다.


사하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곧바로 연락을 넣는 건 지나친 집착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동안 사하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어느 때 어떤 말투로 다가가는지가 늘 신경 쓰였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상한 결론에 도달했다. 아예 내가 연락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나를 밀어 넣자. 그렇게 하면 적어도 고민은 덜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몇 주 만에 회사로 출근하기로 했다. 제타웨이를 타고 2구로 이동하면서, 1구에 사는 사하와 조금은 가까워진 것만 같아 괜히 마음이 안정되었다. 회사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서울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자 허전해졌다. 어제 일을 미리 다 끝내놓는 바람에 급하게 처리할 업무도 없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그녀와 떠나는 여행을 상상했다. 그저 그런 상상일 뿐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들떴다.

지나가는 직원들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
‘저 사람은 왜 회사에 나왔을까?’
‘저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을까?’
‘나처럼 어제와 오늘의 감정이 이렇게 다르면 어떡하지?’

마치 숨겨둔 햄스터를 가방에 몰래 넣고 온 초등학생처럼,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한가득 안고 일했다. 퇴근할 때쯤 사하에게 전화를 해볼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오후 4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사하.


“여보세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통화부스로 향했다.

“통화 괜찮아요? 업무 중이죠?”

“아뇨. 괜찮아요. 오늘은 회사로 나왔어요.”

“바쁘신데 전화한 건 아니죠?”

“정말 괜찮아요. 사실 곧 퇴근하려고 했어요.”

짧은 정적 뒤, 그녀가 말했다.

“네. 그냥 전화했어요. 뭐 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그냥’이라는 말이 마음을 간질였다. 나는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그녀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전화를 건다. 관계라는 게 원래 이런 온도차를 품고 있는 걸까.


“사하씨는 오늘 뭐 했어요?”

“우리 동갑이니까 말 편하게 해요.”

그녀의 제안은 갑작스럽고도 자연스러웠다.

“…응, 그래.”

말을 놓는 게 어색했지만, 이 통화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난 뭐, 늘 똑같지. 평일엔 레지던시에 있고. 지금도 작업실이야. 우리 언제 또 보나 생각하고 있었어.”

‘우리’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나왔다. 그 말 하나가 긴장을 스르르 녹였다.

“주말에 한강에서 서울 레이저쇼 볼까?”

그녀가 피식 웃었다.

“본 적 있어?”

그 뉘앙스를 파악할 수 없었다. 시험하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나도 본 적 없어. 오늘 제타웨이 타고 오다가 광고 봤어. 이번 주말에 한다고 하더라고. 넌?”

“나도 안 봤어. 그럼… 첫 데이트를 서울 레이저쇼로 생각한 거야?”

그 말도 모종의 테스트처럼 들렸다. 정답을 찾으라는 문제 같았다.

“사실 생각해 둔 건 아니고… 정하지 못했어.”

솔직함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음… 그럼 진짜 하고 싶은 건 뭐야?”

‘진짜’라는 단어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나는 레이저쇼가 가짜가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그녀와 보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으니까.

“…진짜? 진짜 내가 원하는 거? 사실 잘 모르겠어. 그냥… 지금 당장이라도 너를 보고 싶어.”

숨어 있던 작은 햄스터가 가방 밖으로 튀어나와 버린 셈이었다.

“듣기 좋네.”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뭘 할지는 만나서 정해도 되지. 너무 생각해두려고 하지 마. 근데 나 오늘은 늦을 것 같아. 내일은 어때?”

“좋아. 언제든.”

“응. 그럼 내일 전화할게. 아니다, 언제든 전화할게.”

“응… 고마워.”

나는 또 ‘고맙다’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부끄럽지 않았다.

우리는 자주 만났다. 특별한 목적 없이, 어디를 가야 한다는 계획도 없이. 센트럴파크를 걷고, 한강 공중 공원을 산책했다. 그녀를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대부분의 알터는 여전히 50대 이상이었고, 20대 여성 알터는 흔치 않았다. 그 나이에 알터가 되었다면 반드시 감춰진 사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고, 질병, 아니면 범죄의 피해자거나.


사하는 2048년 Z사의 ‘버닝게이트’ 사고 피해자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교통사고는 흔했다. 고령 운전자 증가로 사고는 해마다 더 늘어났고, 노령층의 운전면허 재갱신 제도 도입 논의도 있었다. 하지만 2039년 ‘수동운전금지법’ 이후 모든 차량이 자율주행으로 전환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해킹이나 오류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자율주행을 허가받은 17개 회사는 엄격한 보안 기준을 통과한 회사들이었으니까.
단, Z사가 ‘버닝게이트’ 자동차 화재 사건으로 퇴출되기 전까지만.


오늘은 사하와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사하를 보고 싶어서인지, 만난 지 3일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리비도 때문인지.
어쨌든 나는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영화? 미술관?
정해두지 않으면, 또 자연스럽게 미술관으로 향하게 될 것 같았다.

사하는 서울 5 대학 출신의 예술가다. 나는 미술관의 오래된 그림들을 보면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으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도 루브르 박물관이 있고, 3D 스캔과 출력 기술로 마띠에르까지 거의 동일하다. 그럼에도 사하는 ‘루브르 서울은 가짜’라고 했다.
“파리에 가서 봐야 진짜지. 그게 존중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에겐 다소 고상한 자기만족처럼 느껴졌다.


사하는 뉴레지스탕스파 소속이었다. AI 예술 개입에 반대하는 집단. 단색화 이후 한국 미술이 세계로 뻗어나갈 때, 이 집단의 영향력은 컸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 그 불완전함을 예술의 마지막 존엄이라 부르며 저항했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게 아이러니하다고 느꼈다. 정작 그 작품을 수집하고 소비하는 이들이 AI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니 말이다.

우리는 결국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사하는 가까운 극장 대신, 늘 14구의 극장을 고집했다. 잭 카멜 감독의 신작 <Layla>는 올해 가장 화제가 된 반응생성형 AI 영화였다. 관객들의 미세한 반응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영화가 조금씩 달라지는 방식이었기에, 누구와 함께 보느냐가 곧 영화의 내용을 결정했다.

나는 이 영화를 벌써 세 번째 보고 있었다.
3구에서는 오락성이 강했고, 17구는 액션이 넘쳤다.
오늘 14구에서 본 영화는 놀라울 만큼 대사가 많았다. 지루할 정도로 많았다.

“17구에서 참 재밌었는데… 14구는 진짜 다르네.”

내 말에 사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17구는 안 봐도 뻔하지 않아? 때리고 부수고 쫓는 이야기.”

그 말투에서 예술가 특유의 선 긋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하를 사랑하지만, 모든 예술가들의 세계관을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때때로 그들은 자신들이 다른 것을 본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아이들처럼 보였다.

“그럼, 만약 말야… 이 영화를 청송교도소 흉악범들 앞에서 틀면 어떻게 될까?”

내 질문에 사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 코딩 방식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3구에서 봤던 버전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소리를 높였다.

“아니! 내가 사는 3구와 청송교도소가 어떻게 같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사하는 담담하게 반박했다.

“3구에는 큰 기업들이 몰려 있잖아. 반응생성형 AI는 ‘사람의 반응’만 입력값으로 사용할 뿐이야. 도덕성, 경제력, 교육 수준 같은 건 고려하지 않아. 3구 사람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기 것을 지키고 남의 것을 빼앗아 이기는 게임에 익숙해. 청송교도소라고 크게 다를까?”

그 말이 불편했다.
3구를 모욕해서가 아니라 혹시 사하가 나를 그렇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럼 14구는 뭐가 다른데? 여긴 시기와 질투가 없나?”

내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당연히 있지. 사람 사는 곳인데. 근데 방향이 달라. 3구는 발전이라는 한 방향을 향해 모두가 움직여. 더 효율적이고 더 빠르고, 더 이기는 쪽으로. 근데 14구는 제멋대로야. 나도 그렇잖아. 나는 뉴레지스탕스파고, 때로는 AI를 거부하고 역방향으로 가잖아. 그냥 모두가 한 방향으로 휘어지지 않는 곳인 거지.”

그 말은 이해되었다. 하지만 이해될수록 그녀가 내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알겠어. 모두가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걸로 해두자.”

나는 대화를 끝내려 했다.

“아니지. 모두가 가치 있는 건 아니야. 청송교도소의 흉악범이 가치가 있는 행동을 한 건 아니잖아.”

“글쎄. 어쨌든… 내가 그들과 똑같은 영화를 보게 된다는 게 좀 슬프네.”

내 말은 분명 비꼼이었다.

“어차피 너와 그들은 달라.”
사하는 담담히 말했다.
“같은 입력에도 다른 행동을 하니까. 너는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이유를 찾고 극복하려고 하잖아. 그들은 회피하고 파괴하려 하고.”

그 말이 나를 위로했는지, 아니면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을 대신해줘서 마음이 놓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대화는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사랑이란 게 어떻게 자라는 걸까.
그저 자주 만나고, 시간을 많이 보내면 커지는 걸까?
아니면 불확실성과 오해, 충돌 같은 것들 속에서 비로소 성장하는 걸까?

사하와 내가 앞으로 어떤 의미가 될지, 나는 생각했다.
과거의 사람들은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는 말을 믿고 싶었지만 미래는 늘 예측 불가능했고, 이제 시간은 더 이상 너그럽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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