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땀방울보다 비평가의 입담이 비싼 시대

예술인가, 가스라이팅인가

by 구찬우

미술관에 들어설 때 우리가 기대하는 건 감동이다. 하지만 요즘 전시가 얼마나 기대에 부응하고 있을까? 작품 자체는 한눈에 봐선 정체를 알 수 없고, 그 가치를 이해하려면 두꺼운 도록을 정독하거나 작가의 시계열 포트폴리오, 심지어 미술사의 방대한 흐름까지 미리 꿰고 있어야 한다. 관객은 그림을 즐기기도 전에 '내가 이 작가의 삶과 철학을 몰라서 감동을 못 느끼나?'라는 자괴감부터 든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술이 눈으로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미리 공부한 사람만 해독할 수 있는 암호가 되어버린 탓이다.


1. 사라진 경외심: 재현의 종말과 상실된 장인 정신의 가치

과거 고전 미술이 대중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핵심은 육체적 노동과 기술적 숙련도, 즉 장인 정신(Craftsmanship)에 대한 본능적인 경외심이었다.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네덜란드, 1606~1669)의 극적인 명암이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네덜란드, 1632~1675)의 지독할 정도로 정교한 빛의 묘사를 보며 관객이 감탄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도의 성실함이 빚어낸 결과물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프랑스, 1887~1968)이 촉발한 재현의 종말 이후, 현대 미술은 개념을 우선시하며 숙련된 기술을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리겠다'는 대중의 냉소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각 예술이 본래 지냐야 할 미학적 성실함과 망막적 즐거움이 사라진 것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다.


2. 머리로 읽는 그림: 해설지 없이는 볼 수 없는 철학의 독재

장인 정신이 떠난 자리를 채운 것은 비대해진 철학이다. 현대 미술이 대중과 멀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이미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미지를 대체해 버린 철학의 독재에 있다. 고전 미술이 성경이나 신화라는 '공유된 데이터베이스'를 가졌다면, 현대 미술은 작가 개인이 만든 '파편화된 철학'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러시아, 1866~1944) 이후의 미술은 작가 개인의 파편화된 사유를 캔버스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특히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미국, 1912~1956)의 사례는 이러한 철학적 프레임이 얼마나 인위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폴록의 무질서한 물감 흔적은 사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이론과 페기 구겐하임의 자본이 합작하여 만들어낸 비평적 신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말해, 이는 작가 개인의 서사만으로 해석하기 힘든 기획된 신화일지 모른다. 관람객은 이제 작품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 도록을 미리 읽고 와야 하는 처지가 됐다.


3. 팝아트의 역설: 시각적 도파민과 경매 시장의 숫자

이러한 난해함 속에서 등장한 팝아트는 일상의 사물을 활용해 예술의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앤디 워홀(Andy Warhol, 미국, 1928~1987)이 제시한 코카콜라병과 같은 시각적 도파민은 고전 미술의 난해한 도상학보다 훨씬 쉽게 대중을 매료시킨다. 하지만 대중이 이 익숙한 이미지에 안도하며 소비한다고 해서 그 가치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팝아트의 본질은 대중을 위한 위로가 아니라, 예술의 희소성을 조롱하고 자본주의의 속성을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냉소에 가깝다. 대중은 화려한 색감에 열광하지만, 정작 그 작품들의 실질적 가치는 대중의 공감이 아닌 경매 시장의 숫자라는 자본의 매뉴얼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팝아트는 가장 대중적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철저히 자본과 결합한 엘리트적 시스템 위에서 작동하며 대중을 소외시키는 가장 불친절한 장르라 할 수 있다.


4. 열린 해석: 비대해진 텍스트 너머의 주체적 감상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미술관 안에서 마주하는 모든 지식이 오롯이 작가의 순수한 철학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작품을 둘러싼 거대한 담론은 기획자나 학예사, 그리고 미술 기관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비대하게 해석되고 부풀려지는 경우가 많기에 권위적 해석에 압도되어 자신의 감각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서도호(Do Ho Suh, 한국, 1962~)의 작업을 마주할 때, 우리는 복잡한 작가론을 숙지하지 않아도 반투명한 직물이 만드는 미묘한 경계와 그 사이를 통과하는 빛의 질감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미술과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인지 모르겠다. 모든 지식을 다 섭렵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기관이 정해준 정답을 맞히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다시 미술관으로 가야 한다. 수많은 작품을 직접 마주하는 그 고집스러운 경험만이 역설적으로 텍스트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타인의 해석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눈으로 작품을 응시하는 반복된 과정은, 빽빽한 글자 속에서 잃어버렸던 망막적 쾌락을 스스로 읽어내는 귀중한 훈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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