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토화의 덫을 넘어선 한국 신진 여성 작가들의 탈젠더 선언
탈젠더적 언어로 새로운 담론을 만드는 다섯 작가에 대하여
숫자가 먼저 말한다.
2025년 1월, 국립현대미술관(MMCA)과 SBS문화재단이 공동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2025'의 최종 수상자로 김영은(1980)이 선정되었다. 이 해 후보 4인은 김영은, 김지평, 임영주, 그리고 콜렉티브 언메이크랩이었고, 개인 작가로 한정하면 후보 전원이 여성이었다.
2025년 2월, 국제 미술계에서도 의미심장한 신호가 왔다.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1979)이 LG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공동 운영하는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한국 작가로서는 최초였다. 2023년 출범한 이 상은 기술을 활용한 혁신적인 작업으로 현대 예술의 지평을 확대하는 작가를 매년 선정하며 상금 10만 달러를 수여한다.
조각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래(1988)는 2024년 현대자동차와 테이트 모던의 파트너십 프로젝트인 '현대 커미션' 작가로 선정되어, 루이스 부르주아·아니시 카푸어·브루스 나우만 등 거장들이 거쳐간 런던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선정된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이 숫자들이 우연의 집적인지, 구조적 변화의 징후인지를 묻기 전에, 이 현상을 가능하게 한 지반을 먼저 짚을 필요가 있다.
우선 제도가 먼저 움직였다. 국립현대미술관과 주요 공립미술관들에 여성 관장이 다수 임명되었고,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도 여성 감독과 여성 작가 중심으로 구성되는 사례가 이어졌다. 테이트, MoMA 등 국제 미술 기관들이 소장품의 성별 불균형을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교정하는 흐름 역시 한국 미술계에 직접적인 압력으로 작용했다. 시장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저평가되어 온 여성 작가 작품에 대한 컬렉터들의 인식이 변화하면서, 글로벌 미술 시장의 교정 흐름이 국내에도 가시화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국만의 특수성이 있다. 글로벌 차원에서 여성 작가의 부상은 주로 컬렉터 수요와 경매 시장의 교정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공립미술관 여성 관장 임명,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구성 등 제도적 변화가 먼저 왔고, 시장이 뒤따르는 구조다. 이 순서의 차이가 중요하다. 더 주목할 것은, 이미래의 테이트 모던 터빈홀, 김아영의 구겐하임 어워드가 한국 내부의 평가가 국제적으로 확인된 사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국제 기관이 먼저 선택하고, 그것이 국내에서 재평가되는 역방향의 흐름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이는 단색화가 국내에서 먼저 역사화되고 나중에 국제 시장에서 재발견된 것과 정반대의 경로다.
그렇다면 이 흐름이 제도와 시장의 열림만으로 설명되는가. 그렇지 않다. 진짜 질문은 다음에 있다.
이 다섯 작가를 한 자리에 놓고 보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여성 작가'로 정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전 세대와 가장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 김아영(1979) : 가상현실, 생성형 AI, 게임 엔진 같은 최신 기술과 퍼포먼스, 조각, 판화 등 전통적인 매체를 결합해 시간과 공간, 문화와 언어를 넘나드는 세계를 창조한다. 대표작 '딜리버리 댄서' 연작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배달 노동의 현실을 SF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한 작업이다. 여기에 젠더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다루는 것은 기술 권력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가속화되는 노동의 문제다.
- 이미래(1988) : 산업폐기물로 이루어진 키네틱 구조물과 점액질, 액체와 같은 비정형 오브제를 조합해 유사 장기처럼 보이는 비체를 창안한다. 촉각을 감정으로 변화시켜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감각을 자극하는 이 작업에서, 신체성은 강렬하게 존재하지만 그것은 젠더화된 신체가 아니다. 유기체와 기계, 생명과 산업의 경계에 놓인 불특정한 몸이다.
- 정희민(1987) : 3D 모델링 소프트웨어와 온라인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겔 미디엄이라는 물질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다. 디지털 이미지의 휘발성을 물질의 고착으로 저항하는 이 과정에서 젠더 서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가 탐구하는 것은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의 긴장, 이미지와 물질 사이의 번역 불가능성이다.
- 이목하(1993) : 소셜 미디어에서 수집한 동시대인들의 셀피를 초상화로 전환한다. 표면만 보면 '여성'이 주제처럼 보이지만, 그가 실제로 다루는 것은 익명성과 가시성 사이의 긴장, 이미지가 되는 순간 사라지는 감정의 층위다. 초상은 특정 여성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싶으면서 동시에 보이기 싫은 동시대적 욕망의 지형을 드러내는 장치다.
- 추수(1991) : 국적도 나이도 성별도 모호한 버추얼 캐릭터 '에이미'를 통해 회화, 영상, 설치, 조각을 넘나드는 작업을 한다. 정체성 자체를 해체하는 이 전략은 역설적으로, 정체성이 얼마나 강력한 사회적 구성물인지를 드러낸다.
다섯 작가 모두 '경계'를 작업의 언어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디지털과 물질의 경계, 유기체와 기계의 경계, 가상과 실재의 경계, 익명과 초상의 경계. 이들은 그 경계를 허물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경계 자체를 작업의 재료로 삼는다. 이것이 "우리는 억압받았다, 우리는 여기 있다"고 선언했던 이전 세대 여성 미술과 질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선언 대신 질문, 고발 대신 해체. 이 언어의 전환이 국제 미술계를 설득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 질문은 불편하지만 필요하다.
1970~80년대 단색화는 한국 미술이 국제 미술계에 내놓은 가장 강력한 집단 담론이었다. 박서보, 하종현, 정상화로 이어지는 이 흐름은 2010년대 글로벌 경매 시장에서 재발견되며 한국 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단색화는 동시에 막혀 있는 문이기도 했다. 특정 세대, 특정 미학, 특정 철학적 언어로 수렴되는 이 담론은 이후 세대가 돌파해야 할 무거운 선례가 되었다.
1980년대 민중미술은 정치적 언어로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그 에너지는 빠르게 소진되었다. 운동의 언어는 운동이 끝난 자리에서 방향을 잃었다.
두 거대한 담론이 지나간 자리에서, 이후의 한국 미술계가 집단적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은 미술계 내부에서도 조심스럽게 제기되어 왔다. 이것은 개별 작가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단색화와 민중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시대가 던지는 질문에 집단적으로 응답하는 새로운 운동이나 언어가 가시화되지 않고 있다는 구조적 관찰이다. 특히 미술 시장의 버블이 꺼진 이후, 기존의 검증된 작가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남성 작가 그룹이 담론의 전면에 나서는 흐름은 더욱 약화되었다.
그 진공 상태에서, 동시대의 가장 예민한 질문들 <기술과 인간, 가상과 실재, 정체성의 해체, 신체와 산업의 긴장> 에 가장 먼저 응답한 것이 지금의 작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 여성이었다.
이 현상을 '여성 작가의 시대'라는 프레임으로 읽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친다. 이들의 부상이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 가두어질 때,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게토화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시장이 아니라 제도와 비평이 먼저 움직였다. 한국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공립미술관 여성 관장 임명,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구성 등 제도적 변화가 먼저 왔고, 시장이 뒤따를 차례이다. 이 순서의 영향력은 결정적이다. 시장이 주도하는 부상은 트렌드로 소비되고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제도와 비평이 먼저 움직인 변화는 미술사 안에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둘째, 국제 미술 기관이 직접 한국 여성 작가를 선택하고 있다. 이미래의 테이트 모던 터빈홀, 김아영의 구겐하임 어워드는 한국 내부의 평가가 국제적으로 확인된 사례가 아니다. (물론 테이트 모던 - 현대, 구겐하임 - LG 의 관계에서의 수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오히려 국제 기관이 먼저 선택하고, 그것이 국내에서 재평가되는 역방향의 흐름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이는 단색화가 국내에서 먼저 역사화되고 나중에 국제 시장에서 재발견된 것과 정반대의 경로다. 이 역방향의 흐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의 작업이 '한국 여성 작가'라는 맥락 없이도, 어떤 지역적·젠더적 프레임 없이도 국제 미술계의 핵심 질문에 응답하고 있다는 뜻이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들의 작업은 '여성 작가의 작업'이라는 카테고리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글로벌 미술 시장에서 여성 작가들은 여전히 젠더 테마 판매나 다양성 이벤트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고, 경매 블록버스터 상위권에는 여전히 남성 작가가 압도적이다. 반면 한국의 이 작가들은 젠더를 직접 다루지 않으면서도 국제 미술계의 핵심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세 번째 지점을 가장 선명하게 입증하는 사례가 이강승(1978)이다. LA와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강승은 초국가적인 퀴어 역사와 미술사가 교차하는 지점에 관심을 두고, 배제된 소수자의 서사를 발굴해 가시화하는 작업을 전개해왔다. 그의 작업은 젠더가 아닌 퀴어 역사, 소수자 서사, 탈식민주의적 아카이브를 언어로 삼는다. 뉴욕 휘트니 미술관(2022), LA 해머 미술관(2023), 파리 팔레 드 도쿄(2023), 암스테르담 드 아펠(2023) 등 세계 주요 기관에서 작업을 선보였고, 뉴욕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 LA 카운티 미술관, LA 게티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23년에는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선정되었다.
이강승의 사례가 이 논의에서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도가 밀어주고 있는 것은 여성이 아니라, 기존의 주류 담론이 다루지 못했던 질문을 가진 작가들이다. <퀴어 역사, 소수자 서사, 기술과 노동, 정체성의 해체> 이 질문들은 성별이 아닌 동시대의 보편 언어에서 나온다. 이강승이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지금의 흐름이 '여성 작가의 게토화'가 아님을 가장 명확하게 증명한다.
그렇다면 이들의 부상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둘 다다. 단색화 이후, 민중미술 이후 오랫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던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집단 언어를 찾는 구조적 필연이 있었다. 그 필연이 특정 시점에 이 작가들을 통해 터져 나온 것은 우연이다. 그러나 그 우연은 오랫동안 준비된 우연이다.
'여성 작가의 시대'가 아니다. 주류 담론의 공백을 탈젠더적 언어로 채우는 작가들의 시대다. 그리고 그것이 게토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게토화는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이다. 이들은 범주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미술사 안에 진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