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젝트, 미술의 성소를 더럽히다

예쁜 미술은 죽었다

by 구찬우

정말 오랜만에 서울남산도서관에 찾아와 글을 쓰고 있다. 2025년 09월 프리즈/키아프 미술주간 이후로 나는 쭉 미태기(미술 권태기)를 겪고 있다. 미술에 빠져 지냈던 10년 차 아트 컬렉터인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 시작은 아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추수'작가의 작품을 보고 나서였다. 어차피 나의 미술평론을 읽어주는 독자도 없고 편하게 표현하겠다. 추수의 작품을 보며 나는 속으로 여러 번 되뇌었던 것 같다. '좆같네. 진짜 씨발 좆같네.' 현대 미술이 계속 이런 것만 보여준다면 나는 그냥 앞으로 미술을 좋아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훗날 이 글을 누군가가 읽게 되어 '추수'작가가 젊은 시절 미술을 좋아하던 사람조차도 이런 악평을 했다고 해준다면 어차피 나만 안목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건 '추수'라는 작가가 한국 미술사에 완전한 자리매김한 이후의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국립현대미술관과 기관이 추수작가를 밀어준다고 해도 그녀의 미술을 좋아할 마음이 없다. 그녀의 작품은 그래도 남들보다는 넓다고 생각한 나의 미학 범위 밖에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미술은 아름답지 않았을까? 오늘 나와 함께, 너무나 전문성이 없는 일개 직장인 아트 컬렉터와 함께 그 기원을 추적해 보자.


우선 '미술'이라는 단어 자체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미술(美術)’은 1873년 오스트리아 빈 세계박람회를 준비하던 일본 메이지 정부가 서구의 ‘Fine Art’를 번역하기 위해 급조한 신조어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이 일본의 신조어가 한국과 중국으로 그대로 수입되었다. 19세기의 신조어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미술'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잘못된 표현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20세기 이후의 현대미술은 '美'라는 이 한 글자가 포괄할 수 없어진다. 그냥 예술 혹은 아트로 표현해 버리면, 20세기 이후의 개념미술/아브젝트 등을 모두 포괄할 수 있지만, 미술사/미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美'의 범위를 광역화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는 '美'를 '아름다움'이 아닌 '시각화'로 의미를 확장해 버리면 단어적 모순과 역설이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언제부터 미술이 보편적 미학을 벗어나기 시작했는지 알아보자. 전편에서 나는 미학의 언어성과 학습을 언급하며, '고야'와 '모나리자'마저도 학습되지 않은 미학 밖의 작품이었다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글에서는 미술사에 기록된 아브젝트 아트를 시작으로 추적해보려 한다. 아브젝트 아트(Abject Art)는 '비천한', '비참한'이라는 뜻을 가진 'Abject'에서 유래한 용어로, 주로 인체의 배설물, 사체, 부패물 등 우리가 불쾌감을 느끼거나 거부하고 싶어 하는 대상들을 소재로 삼는 예술 경향을 말한다. 이 개념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저서 '공포의 권능(Powers of Horror)'에서 정립된 '아브젝시옹(Abjection)'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나의 소설 '사랑하는 나의 XX에게'의 주인공인 사하의 첫 전시에 등장한 일렬로 정렬된 사용한 생리대 설치 작품도 아브젝트 아트이다.


아브젝트 아트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키키 스미스(Kiki Smith, 미국, 1954~)'부터 검색될 텐데, 아브젝트라는 개념 자체를 확대한다면, 미학을 전복한 '마르셀 뒤샹'을, 혹은 엥포르멜을, 혹은 신체를 고기로 해석한 '프란시스 베이컨'을 시작으로 해도 될 테다. 하지만 불쾌/혐오의 1차원적 감정을 도구로 사용한 것을 아브젝트 아트로 정의하려면 '키키 스미스'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아브젝트 아트를 하나의 사조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브젝트는 사조가 아니라 표현의 방법론이다. 현대미술의 어떤 사조에서도 차용할 수 있는 표현의 도구로 해석해야 한다


왜 국립현대미술관은 이 아브젝트 아트를 도구로 사용한 젊은 작가 '추수'와 '이미래'를 주목하고 지원하고 있는 걸까? 런던의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 본 이미래의 전시는 사실 너무 국뽕이 차올라서 그저 멋지고 좋았었다. 테이트 모던 터빈홀 전시가 사실 현대 자동차의 후원으로 가능했겠지만, 해외에서 한국작가가 그렇게 멋지고 미술사의 기념비적인 공간에서 전시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어떻게 감동받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미래 작가는 아브젝트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고 있었다. 아브젝트는 방법론 혹은 도구이기에 어떠한 사조의 편입 당락과는 다른 개념이다. 문제는 내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 '추수'의 전시에서 시작되었다. 국뽕 0%의 상태에서 마주한 한국의 젊은 작가의 아브젝트 아트는 나에게 오롯이 혐오만을 남겼다. 아브젝트라는 다루기 힘든 도구를 다루기엔 부족해 보였다. 작가의 기획의도가 맞다면 할 말은 없지만, 몇 개월간의 미태기를 줄 만큼 치명적이었다.


아브젝트는 미학의 파괴가 아니라 영토의 확장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기술로서의 미술을 넘어, 이미래의 점막질 기계, 추수의 가상 괴물을 통해 인간의 가장 취약하고 비천한 지점을 직면하게 함으로써 예술의 정의를 다시 쓰게 만든다. 언어가 의미를 지배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이제 ‘미술’이라는 단어 뒤에 숨은 ‘미(美)’의 기준을 고전적 조화가 아닌 실존적 충격과 진실의 대면으로 재정의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아브젝트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불결한 것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묻고 있다.

라고, 내가 이 글을 무책임하게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왜냐면 나의 미학의 범위가 '추수' 그녀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브젝트를 미학으로 학습하고 치환하는 것이 내가 성장하는 방향이라고 해도 나는 여기서 멈추려고 한다.


아브젝트 표현을 확장해 보면 사실 지금 리움에서 전시 중인 이불작가도 포함된다. 생선의 썩은 냄새를 전시장으로 가져온 혐오적 표현, 그리고 곧 3월 오픈하게 될 국립현대미술관의 데미안 허스트 (포름알데히드 상어) 전시까지 아브젝트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들의 전시는 분명 나의 미학 범위 안에 철저히 존중받고 있다.


나는 미태기를 겪으며 '얼터너티브 락'을 많이 생각했다. 얼터너티브 락은 '섹스, 파티, 쾌락, 사랑'을 주제로 하고 화려한 메이크업과 복잡하고 화려한 초고속 솔로 기타 연주에 저항하며 사회 속의 자아를 돌아보는 대안이었다. 아브젝트가 어쩌면 '미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고정관념(아름다움)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아브젝트 아트가 지향하는 충격적인 시각 언어인데, 왜 새로운 대안타령을 하냐고 생각하겠지만, '추수'의 미술은 나에게 그저 '극단'으로 치닫은 범위 밖의 미학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대안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기'이다.


그래서 올해는 '김연홍'작가의 작품을 컬렉팅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내가 좋아했던 미술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내가 더 오래 미술을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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