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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Jan 18. 2021

01. 항상 ing인 사람, 엄정화

'호피무늬'를 듣고 '구운몽'을 다시 듣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시절은 컴퓨터 교육이 붐이었던 시대였다. 고학년이 되자 학교에서도 컴퓨터로 수업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방과 후 수업으로 기초 컴퓨터 활용반이나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취득반이 생겼다.

 7살 때 대학생이었던 삼촌 덕에 또래에 비해 굉장히 빨리 컴퓨터를 접하였지만(온 가족이 사법고시 공부를 위해 집을 비운 막내 삼촌의 컴퓨터로 바통터치를 하며 도스 게임을 열심히 해댔다.) 그것과 컴퓨터 활용은 다른 문제였기에 엄마는 5학년 때부터 날 방과 후 컴퓨터반에 보내기 시작했다.


 당시엔 익스플로러보다 넷스케이프가 점유율이 높았던 시절이라, 넷스케이프로 웹서핑을 배웠다. 수업시간 중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이니셜과 생일을 조합해 한메일 계정을 만드는 수업도 했다. 어느 날 수업 중 (아마도) MBC 홈페이지에 접속해 MBC 측에서 제공하는 몇몇 연예인의 사인을 메일인지 하드인지에 받아 선생님께 검사를 받는 날이 있었다. 99년도는 이미 1세대 아이돌을 지나 2세대 아이돌이 데뷔하던 시기였고, 당연히 한창 인기 절정을 구가하던 그들의 사인은 없었다. 그나마 받을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고 스크롤을 내리다 엄정화의 사인을 내려받아 프린트한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미 그 시절에도 톱스타였던 엄정화는, 당시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이던 어린아이가 30대 중반이 되어버린 이 긴긴 시간까지 아직도 건재하다. 아직도 그녀의 대표곡들을 가사도 보지 않고 부를 수 있고, 노래방에서 흥겹게 불러 젖히기도 한다. 하지만 나만의 즐거움과는 다르게 보컬로서의 능력에 대해 호평하는 이야기를 접하면 고개를 갸웃하게 될 때가 있었다. '살아남은 대단함은 인정하지만 그게 가창력 때문인가?' 하는, 그런 의문. 그렇다 해도 여전히 나는 그의 앨범을 기다렸고, 또 열심히 듣곤 했다.


 그가 3년여의 음악적 공백을 끝내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환불 원정대' 덕분이었다. 방송 덕에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수술 후유증과 심리적인 불안감, 또 명실공히 여자 솔로 가수로서 명성을 지킬 수 있었던 인고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불안을 딛고 필요할 땐 도움을 받아 결국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 모습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런 그가 지난 12월 22일, '호피무늬'라는 신곡을 발표했다.


https://youtu.be/8AekHr7ci6A


 개인적으로 모든 것이 맘에 드는 곡과 뮤비는 아니었지만 이 곡의 백미는 생각지도 못한 엄정화의 목소리였다.

 화사의 도입부가 끝나고 엄정화의 파트 가사를 보면,


우린 매일 벼랑 끝에 매달려서 사는 feeling 사는 게 그런 거래 철벽 아님 절벽 같은 삶에 느껴지는 위기 수척해졌어 my face 우리 마음은 이미 굳어가는 concrete in the city 너의 눈은 시멘트색


 이란 가사가 나온다. '너의 눈은 시멘트색'이란 부분을 들을 때 엄정화의 보컬을 주목해보자. 그에게서 이런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난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런 소리도 낼 수 있는 사람이었어?!' 머리를 한 대 크게 얻어맞았다.

 덕분에 금방 질려버리는 내 플레이리스트는 엄정화를 필두로 한 곡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아, 이제야 엄정화의 아티스트적 면모에 대해 접했던 그 수많은 찬사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시 듣게 된 'The Cloud Dream of the Nine', 일명 구운몽 앨범은 당시 선 발매된 네 곡에 이어 왜 나머지 곡들이 나오지 않나 1년을 기다렸던 그 시절로 나를 훌쩍 데려가버렸다. 다시 들은 이 앨범은 새삼스럽게 어마어마한 완성도를 가진 앨범이었고, 첫 곡부터 다시는 새로운 곡을 들을 수 없는 아티스트의 피처링으로 쓸쓸함을 느끼게 했다. 한 곡 한 곡 정성을 담아 만들고 부른 그는 'Watch me move'를 외치다 화려하고 갈팡질팡했던 순간들을 지나 자유를 찾아내고 'Ending credit'을 올린다. 그리고 'She'(쉿)을 읊조리며 내밀한 내면을 드러낸다. 앨범의 서사는 완벽했고 그저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면 31분 28초의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정상의 자리에 선 사람에게는 내리막길밖에 남아있지 않다. 비단 정상에 선 사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에너지가 넘쳤던 10대와 20대를 지나 중년을 거쳐 사소한 것조차 몸이 제 말을 듣지 않게 되는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 누군가는 슬퍼하고, 누군가는 기회로 삼고, 누군가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내리막길을 어떻게 감당하고 받아들이고 걸어 내려올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에 달렸다. 


 그는 정말 그답게,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멋지게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항상 끝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 않는다. 동시에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겐 그래도 괜찮다고, 존재 자체로 큰 위로를 준다. 환불 원정대에서도 '마지막 무대'에 대해 언급하는 모습이 참으로 마음 아팠지만 그는 '호피무늬'로 아주 빠르게 돌아와 주었다.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도 현재 진행형일 그가 힘이 닿는 한 그의 음악을 계속해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으로 첫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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