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유치원 가기 싫다.... 아직 출근 안 했지만 벌써 집에 가고 싶다.
아침저녁으로 염불 외듯이 중얼거리던 말이다. 애들만 유치원 가기 싫다고 우는 게 아니다. 나도 울었다. 진짜로. 그것도 아주 많이 매우 자주. 애들은 가끔 부모님 찬스 써서 결석이라도 하지, 난 그런 것도 없다. 매년 개근이다! 개근상도 안 주는데... 보너스라도 주라 줘!!!!
매일 아침 출근길에 양 뺨을 따라 눈물이 또르르 흐르고, 핸들을 꺾어 아무 곳으로 도망가버릴까, 이대로 잠수 탈까 번뇌가 깊었다. 악몽도 자주 꿨다. 출근해서 미친 하루를 보내고 기진맥진한 채로 눈을 떴는데 그건 꿈이었고 이제 진짜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그 기분... 다시 생각해도 토할 것 같다.
이런 증상들은 퇴사하기 바로 전 해에 유독 심했다. 스스로 '와- 한계구나.' 하고 절절하게 느꼈다. 지금 당장 가방 들고 뛰쳐나가도 내일이 걱정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러다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내가 죽는 것보단 차라리 또라이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며 합리화를 시도했던 날들...
그렇게 힘들어도 끝까지 내 발목을 잡았던 건 망가질 커리어도 돈도 아닌 아이들이었다.
'드디어 담임 선생님이 생겨서 너무 좋아요.'
학기 초에 학부모에게 들었던 이 말도.
바로 전 해에 학기 중 담임 선생님이 그만두며 넉 달 동안 대체교사가 맡았던 반에서 올라온 아이의 학부모가 한 말이었다. 이 학부모뿐만 아니라 그 반에서 올라온 다른 아이의 학부모 몇 명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 아이들에게 2년 연속 담임이 바뀌는 충격을 줄 수는 없다는 책임감으로 1년을 버텼다.
교사는 어쨌든 1년은 버텨야 한다. 1학기 시작부터 수료/졸업의 순간까지의 1년. 시작하면 무조건 1년은 책임져야 한다. 1년 버티면 퇴직금이라도 받는 거 아니냐고? 사립에 그런 거 없다. 1년 채우든 안 채우든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 교사가 1년을 바라보는 건 오직 아이와 학부모에게 1년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제가 이 1년 동안 이 아이들을 책임지고 교육하겠습니다.
내가 이 1년 동안 너희들을 지켜줄게.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 어떡해...
고작 1년일 수도 있겠지만 1년이 주는 압박과 부담감은 생각보다 크다. 왜냐면 1년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져서...
지옥 같은 3월
지옥에서 벗어나나 했는데 여전히 지옥인 4월
더럽게 바쁜 5월
아이들이 고삐 풀리기 시작하는 6월
지긋지긋한 여름이라 물놀이가 시작되는 7월
여름 캠프가 있는 8월
가을 행사를 시작하는 9월
가을 행사의 절정인 10월
느긋해지나 싶지만 2학기 학부모 상담이 기다리는 11월
김장으로 시작해 크리스마스로 끝나는 12월
남은 활동 몰아치는 1월
1년 마무리와 신학기 준비를 동시에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2월....
시기마다 해야 할 일들이 눈에 그려진다. 이렇게 앞으로 기다리는 고생을 너무 잘 아니까 더 힘든 거다.
그런데도 중간에 튀지 않고 버틴 나 너무 책임감 넘쳐서 짜증 나네?
나는 힘이 들 땐 시(인 척하는 글)를 써.
진짜 도망갈 수 없으니 교실에 도망갈 구석을 만들자. 교실에 나만의 안식처를 만드는 거다.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잠깐씩 내 정신건강도 챙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난 아이들이 등원하기 전에는 조용히 붙박이 옷장 속에 숨어 있기도 했다. 어둡고 아늑해서 정말 도망간 느낌이라 좋더라. 하지만 아이들이 등원한 뒤에도 옷장 속에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한눈에 살필 수 있으면서도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 바로 교사 책상에 내 안식처를 만들었다.
내 책상이 있는 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시 몇 개를 프린트해 곱게 코팅까지 해서 붙여놨다. 교실 환경과 잘 어울리는 귀여운 시를 골라 환경 구성에 사용하기도 했다. 내가 직접 써서 가장 내 마음에 와닿는 내 시들은 남들 눈에 닿지 않는 붙박이 옷장 문 안쪽에 몰래 붙여두었다.
정말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소소한 구석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꽤 크다. 아이들을 보내고 컴퓨터 앞에 앉아 바쁘게 일을 하다가도 고개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일하다가 5분만 투자해서 다른 시로 바꿔 붙일 때는 또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구석이 가장 쉽고 빠른 기분전환이 되기도 한다.
교실은 교사의 영역이니까, 도망갈 구석을 만들기 딱 좋은 곳이다. 내가 좋아하는 간식을 가득 채운 바구니를 숨겨두기에도 좋고! 좋아하는 차와 커피를 둘 다 준비해놔서 힘들 땐 커피 먹고, 잠시 여유로울 땐 차 한 모금 먹으며 아주 잠깐 숨 한 번 돌리는 일이 의외로 큰 도움을 준다.
물론 이것만으로 모든 걸 극복할 수는 없다. 그래도 아이들을 위해 구급상자를 늘 구비해두는 것처럼, 교사에게도 스스로 응급 처치할 수 있는 구급상자 하나 마련하는 마음으로 교실에 도망갈 구석 하나는 꼭 만들어 보자.
이 글은 무조건 버티기만 하라는 강요 글이 아니다. 도망만이 유일한 답인 곳에서는 빨리 도망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교사도 소중한 사람이니까.
개인적으로 유안진 시인의 '키'를 사랑합니다. 싫은 사람 돌려까기에도 좋음. ^^
지극히 개인적인 추천 시집: 나희덕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 시집 '너에게 주고픈 아름다운 시' / 시집 '시를 잊은 나에게' / 시집 '다시, 사랑하는 시 하나를 갖고 싶다.' / 이원하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