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 두렵다? 웃기지 마라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오로지 목적과 목표만 바라보고 달렸던 생각만 난다. 질러가든 돌아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는 생각만 했던 것이다. 주변을 챙기거나 돌아보는 것은 사치라고 여겼다. 다만 요령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 이긴 했다. 좀 더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혹은 윈윈 하는 방법이 곰곰이 잘 생각하면 나왔을 수도 있었다.
나의 이런 태도는 요즘 세태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그 당시에는 잘 맞았다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요즘은 요령이 있는 사람이 잘 되는 시대인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정공법보다는 우회와 돌려치기가 잘 먹히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요령 있게 실속을 차리고 이른바 ‘핵심’만 빼먹으면 되는, 즉,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주 놀랍고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을 봤다. 직장에서 일을 잘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일을 잘하면 잘하는 놈에게만 일이 계속 들어오는 법칙 같은 게 있어서이다. 잘하니까 일을 더 시키니 자기만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을 잘하지 말라고 한다. 이게 도대체 젊은 사람들에게 할 말인가?
어느 조직이나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니 오래가기 위해서는 잘해야 한다. 조직이 잘하는 것은 조직의 구성원들이 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은 구성원의 상향 평준화를 지향하지 하향 평준화를 지향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이런 몸부림은 눈물겹고 처절하다. 하물며 조직에서 살아남으려는 개인은 오죽하랴.
일을 요령 있게 하고, 일의 핵심을 잘 찾아내는 능력은 그냥 길러지지 않는다. 셀 수 없는 ‘삽질’과 ‘뻘짓거리’를 통해 익혀진다. 거기에 상사와 동료의 ‘잔소리’와 ‘질책’, 후배들의 ‘도전’이 덧붙여진다. 또한 일은 일을 통해서만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인문 서적 읽기, 신문 읽기 등, 내 분야와 맞든 안 맞든 꾸준하게 사유하고 공부해야 한다. 알고리즘에 의해 우연히 보게 되는 유튜브와 같은, 내가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남이 알려주는 지식은 온전히 내 것이 되기 힘들다. 내가 아쉬워서, 필요해서 발품을 팔고, 직접 찾아내고, 읽어 봐야 내 것이 된다. 자료를 찾고 공부를 하는 것도 ‘실패’처럼 보이는, 혹은 ‘쓸데없이 시간만 버렸네’라는 자괴감을 숱하게 경험하고 나서야 제대로 자리 잡는다.
물론 이건 내 기준이다. 천재는 금방 할 수 있다.
‘앤 해서웨이’와 ‘로버트 드 니로’의 <인턴>이라는 영화가 있다. 로버트 드 니로는 ‘시니어 인턴’인데, 열정 많은 CEO인 앤 해서웨이의 심기를 잘 살핀다. 그는 이른바 ‘크리티컬 모먼트’를 기가 막히게 잡아 내는 능력을 보여 준다. 그래서 처음에는 꺼려하던 CEO가 나중에는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사원이 된다. 로버트 드 니로의 이미지와 어쩜 이리 딱 맞는지 놀랍다.
크리티컬 모먼트는 아무나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업무를 잘 알고, 업무 프로세스도 잘 알고, 오너나 책임자의 심기도 잘 알아야 한다. 이런 것만 안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 운이 따라야 한다. 경쟁 회사가 달라질 수도 있고, 정부의 정책이 바뀔 수도 있고, 변수는 너무나 많다. 크리티컬 모먼트를 노린다는 것은 복권이 당첨되는 것과 비슷하다. 100장 샀다고 모두 당첨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매주 꾸준히 사도 될까 말까 하는 게 복권인 것처럼, 매 순간 일을 열심히, 최선을 다 해도 크리티컬 모먼트가 올지 말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크리티컬 모먼트는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내 정치적으로 포장되면 좋은데, 그냥 묻힐 수도 있다. 평소에 게으름 피우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크리티컬 모먼트를 잡는 걸 어느 오너가 용납할까.
일을 할 당시에는 이게 크리티컬한 것일지 뻔한 짓거리일지 아무도 모른다. 일잘러가 되면 정말 일을 많이 하게 돼서 번아웃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번아웃을 겪어 본 사람은 안 겪어 본 사람보다 한 차원 높아진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다음에는 그 이상의 압력을 받아도 번아웃을 겪지 않을 탄탄한 사람이 된다. 확실하다. 번아웃이 두려워서 일을 안 한다는 것은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것이다. 이혼이 두려워서 결혼을 안 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조직은 잘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기준을 상향한다. 그래야 사람이 키워진다. 그렇지 않은 조직은 퇴보한다. 내가 번아웃이 왔는데 대체할 사람이 나타나는 조직은 건강한 조직이다. 그런 조직은 배울 게 많을 것이다. 대체할 사람이 없어서 내게 계속 일을 강요하면 그만두면 된다. 사람을 키우지 못하는 조직이 성장을 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번아웃이 올 정도로 배우고 나가는 것이다. 조직은 망할지언정 나는 뻗을 수 있다.
요령을 피울 수는 있을지언정 어디에나 통용되는 쉬운 방법은 없다. 신명(身命)을 바쳐야 뭐든지 얻을 수 있다. 젊은이들이 이런 패기를 가지고 도전해야 조직이 산다. 그런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긴장하고 조심한다.
일잘러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