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즐거운 독일
독일 카니발의 끝자락, 오늘 아침. 그간의 사건 사고를 전하는 소식으로 라디오 뉴스가 시작된다 - 카니발 행진에 참여하기 위해 가던 사람들 교통사고 발생으로 여러 명 부상, 카니발 차량에서 추락한 38년 청년 사망, 스프레이 가스 폭발로 인하여 11명 경상, 술 취한 29세의 남성의 난동으로 경찰관 3명이 부상, 43세 여성이 카니발 파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강에 빠져서 사망... 백만 명 가까이 되는 인파가 여러 개의 도시에 모여 즐기는 축제이다 보니 매년 사건 사고가 발생한다. 즐거움 뒤에 이런 사고 소식을 들어서 안타깝고 기막히지만 독일 중부지역이 마비되면서 모두가 꽐라 되는 카니발은 내년에도 같은 방식으로 계속될 것이다.
이 카니발 행사는 하루 이틀 즐기고 끝나는 것이 아닌 장장 40일에 걸친 축제이다. 전 독일을 들끓게 하는 행사라기보다는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중부지역인, 쾰른, 뒤셀도르프, 마인즈에 모여 일 년 치 마실 술을 5일 안에 해치우는 듯한 행사인데 나는 이 카니발의 대표 도시 중 하나인 뒤셀도르프에 살면서 매년 이 사달을 라이브로 만끽한다. 독일에서는 남들에게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매우 좋지 않게 평가하기에 한국에 비해 음주를 자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축구 토너먼트가 진행되는 기간의 축구팬들은 제외다). 하지만 카니발의 음주문화는 애미애비 못 알아보도록 마셔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기에 소싯적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회식 끝에나 보던 장면들이 독일 거리에서 연출되면서 이 사람들이 한껏 정답게 느껴진다. 오 동지들이여~~~
기뻐하는 독일인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
무표정이나 무뚝뚝함이 디폴트로 소문난 독일인들에 카니발은 사회적으로 허락받고 미치광이가 되는 날이다. 독일인들은 평소 감정표현을 잘하지 않고 웬만해서는 큰소리를 내지 않지만 카니발 기간 동안에만은 술의 힘을 빌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거나 평소 같았으면 눈길 한번 안 주었을 거리의 타인들에게 실없는 인사를 날리며 안 어울리기들 친근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평소에 감정적으로 대단히 억눌려 사는구나 하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도 드는데 어쨌든 이것이 내가 독일 카니발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기뻐하는 독일 사람들을 5일 연속으로 볼 수 있는 이색적 기회! 이성적이고 진중한 인상을 독기 있게 풍기는 독일인들이 배시시 웃으며 헬라우를 목 놓아 외치는 진풍경은 카니발이 아니면 좀처럼 보기 힘들다. 줄줄이 나사 풀린 독일인을 (참, 남부에서는 옥토버 페스트에 나사 풀린 인간들을 영접한다) 애써서 예쁘게 봐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의 복장(코스튬)이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덩치 큰 병아리, 구토하는 사자, 울부짖는 캥거루, 귀여움과 담쌓은 세사미스트릿 쿠키 몬스터까지.. 다들 이리 코스튬을 곱게 차려입고 얼굴에 분칠까지 하는 정성으로 카니발에 임하니 일상의 질서를 좀 어지럽히고 술 먹고 진상을 부려도 모든 것이 용서된다.
경계인으로 살며 알게 모르게 독일인들의 눈치를 보게 돼서 그런가 아세트알데히드가 첩첩이 혈중에 쌓여서 동물의 탈을 쓰고 시내를 방황하는 독일인들을 보면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물론 나 역시 한때는 그들과 하나 되어 신나게 술 먹고 꽐라 되었었다. 작금의 나는 의지가 없다기보다 숙취에 급 약해지는 바람에 내일이 없다며 부어라 마셔라 하는 용기백배의 세계에서 조기 은퇴하게 되었다. 저질 체력으로 카니발의 기대에 부여하는 혈중알코올 농도의 수치는 맞추진 못하지만 훌륭한 국제적인 행사가 우리 동네에서 열리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기에 열심히 방범이라도 돈다.
시내를 훑으며 지난 5일간 사람구경을 했다. 이만한 관광이 어디 있으랴? 위트 넘치는 복장들을 하고 아침부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내를 누비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 카니발 복장을 장만하는데 아낌없이 돈을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친구끼리 가족끼리 콘셉트를 정해 놓고 맞춰 입고 떼 지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유독 눈이 간다.
이렇게 삼삼오오 모여서는 선술집들을 정거장 삼아 들락날락하며 마시거나 아예 집에서부터 술다발을 몸에 지고 나와 거리에서 마시며 알코올 농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세심하게 샐프 충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작년에 18세가 되어 고 3 때부터 합법적으로 음주의 세계로 입문한 나의 아들은 세상의 술을 한방에 섭렵하기라도 할 듯한 저돌적 기세로 이 리그에 발을 들였다. 주말마다 꼭지가 돌게 마시고 새벽에 몰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루틴 삼아 살아가던 어느 날, 늘 하던 데로 술집에서 친구들과 부어라 마셔라 한 후 한밤중에 귀가하다가 공원에서 노상방뇨를 했다. 때마침 순찰 돌던 경찰에게 영광스럽게 걸려 18년 인생 최초로 벌금형을 수여받았다 (자랑스럽다, 내 아들 ㅜㅜ). 당시 우리 아들과 함께 있던 5인조의 음주단은 모두 18세로 다들 공원구석에다 물을 주었으나 가장 덩치 크고 (미련한) 우리 아들만 덜미를 잡혔다. 그 사건은 나름 같이 있던 아이들에게까지도 충격으로 남아 한동안 우리 아들의 범죄는 인구에 회자되었고(특히 아들 학교교내에서) 이번 카니발에 이넘들의 코스튬 컨셉은 '죄수'가 되었다(노상방뇨 죄역인들!). 그날의 절친 5명은 그렇게 셀프디스를 모토로 하는 카니발 복장을 장만하고는 카니발의 시작을 알리던 아침 11시에 "보송보송한 죄수복을 입고 집을 나서서는 그다음 날 점심 12시에 (즉 25시간 후에) "폭싹 젖은 죄수"의 모습으로 (카니발 기간에도 하루종일 비가 왔다..) 돌아왔다.
각설하고 이렇게 카니발의 복장은 친한 친구들끼리 맞추어 입기도 하고 매년 새로운 컨셉을 정해서 사 입거나 직접 제작하는데 이 일에 사활을 거는 사람들도 많다. 카니발 한 달 전부터 무슨 복장을 준비할 것인지의 대화가 나올 때마다 나는 스리슬쩍 모른척한다. 카니발 준비도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지 나같이 게으르면 생각하기도 귀찮다. 심지어 혼술을 하더라도 머리에 띠라도 두르고 나가야 하기에 게으르면 카니발에 술 먹기도 힘들다. 밖에 나가려면 몸에 무엇 하나는 걸치던가 얼굴에 왕점이라도 찍어야 '나 역시 오늘 카니발을 즐기러 나왔습니다'라는 소속감을 드러낼 수 있다.
11자로 시작하여
카니발 시즌은 매년 11월 11일 11시 11분에 시작하는데 이 11이 광대의 숫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을 알려 놓고 사람들은 제각기 그다음 해에 이루어질 행사 준비에 착수한다. 개개인으로서 특별하게 준비할 일은 없겠지만 시가행진 참여를 신청했으면 할 일이 많다. 동네별로 기관별로 카니발 준비 위원회가 구성되고 어떤 테마로 카니발에 행렬에 참석할지 의논하기 시작한다. (그냥 단순히 술 먹고 꽐라 되는 행사만은 아니다) 2월 10일경에 시가 행렬을 하는데 요일은 정해져 있으나 날짜는 매년 달라진다. 그 이유는 부활절 일요일을 48일 앞둔 월요일이 시가 행렬의 날짜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날을 장미의 월요일 (Rosenmontag)이라 부르고 그전 주말(목요일부터 시작된다)부터 거리와 시청광장 근처의 술집들은 장사진을 이루며 본격적인 부어라 마셔라의 행사가 시작된다.
카니발 음악은 쿵짝쿵짝 단순하고 유머 섞인 가사의 노래들로 보통 악단을 동반하고 테크노, 힙합, 랩 등 현대기술이 섞인 음악들은 이 기간에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술 취해도 따라 부르기 쉬우라고 만들어진(?) 슐라가(schlaga) 음악은 우리의 트로트와 비슷한 장르인데 이 음악의 단순함은 맨 정신으로 듣기엔 부담스럽다. 독일에서 인기 많은 슐라가 음악의 대표적인 '내가 머리를 예쁘게 했어 (Ich hab' die Haare schön)'라는 노래는 가사의 90퍼센트가 '내가 머리를 예쁘게 했다'이다. 외국인으로서 완벽하게 따라 할 수 있는 독일노래가 생겨서 기쁘긴 하지만 맨 정신으로 단일문장으로 한곡을 꽉 채운 노래를 견디는 것은 고난이도의 정신노동이다.
정치풍자 예술의 정점
독일 카니발의 정수는 촌철살인의 정치풍자 시가 행렬이다. 카니발 행렬은 보통 150여 개의 카니발 단체와 100대가량의 차량이 참여하는데 행렬을 보러 나온 사람들을 예케 (Jecke, 바보, 우매한 백성이라는 뜻)라고 부르며 사탕, 과자, 초콜릿, 젤리 등을 던져주며 풍부한 볼거리와 당분을 제공해 준다. 사람들은 집에서 준비해 간 알코올을 홀짝 거리며 라이브 공연을 보듯 소리 지르고 던져주는 선물들을 줍고 웃고 즐기며 (날씨와 상관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게다가 카니발 행렬 차량의 예술적 퀄리티는 넘사벽이다. 수개월간 공들여 만들어낸 작품임이 역력히 보인다. 어떤 작품을 어떻게 제작할 것인지 회의에 회의를 거쳐 만들어지고 시민들의 작품은 나중에 시상까지 해서 적지 않은 상금도 지급한다.
올해 작품들 역시 멋지고 속 시원했다. 현재 총리인 올라프 슐츠의 정치적 전략이 부재함을 풍자하는 "무뇌 총리"가 모든 신문과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오마나 잘 만든 것! 투표로 뽑힌 정치적 리더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때 비판받는 것은 당연하고 시민들은 당당하게 비판하고 조롱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이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카니발은 이것을 공론화할 수 있게 허락된 페스티벌이다. 독일의 총리처럼 개인비리가 아닌 정치적 무능을 가지고도 거리에서 망신을 탱탱하게 당하며 온 미디어를 덮을 수 있는 독일의 건강한 언론사회 지형이 그 어느 때보다 부러웠다.
이뿐이냐 사민당-녹색당-자민당의 신호등 연정정부의 무능이 독일 극우세력을 키워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음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행렬도 있었다. 정책 노선이 크게 다른 세 당이 치열하게 싸우고 타협해서 만든 신호등 연정정부는 메르클의 16년 재임 후 변화를 갈구하던 독일인들에게 선택받았으나 전쟁을 위시한 외부적 환경이 불리하게 작용하면서 경험부족과 역량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독일 내에서 극우 세력들이 득실거리게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 지난 몇 주간 독일 내에서는 극우세력을 반대하는 집회가 주요 도시에서 거대하게 개최되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데모를 하는 바람에 경찰인력 부족으로 고생할 정도로 시민 참여가 극에 달했다. 이에 대해 슐츠 총리는 국민들의 극우반대에 대한 데모를 격려하고 존경을 표했는데 이럴 때 나는 정말 참을 수 없는 질투심을 느낀다. 나도 정치적 약자를 위해 힘쓰는 정부를 가진 나라의 국민이고 싶다!!!
국제 정치에 대한 풍자도 멋지다. 미국을 좀먹고 있는 트럼프의 행보를 드린 작품은 자세히 보니 미국국기가 독일나치 모양으로 갉아 먹혀 있다. 트럼프의 고약한 전략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극우화 시키고 있음을 상기시키는 행렬이다.
왜 미국 정치권에는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질 못할까? 바이든 vs 트럼프 구도는 언제까지 갈 것인가... 미국정치 못알이지만 내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바이든의 말실수를 조롱하는 기사들이 계속해서 뜬다. 나이 든 바이든은 정치생명이 끝났으니 트럼프를 뽑아야 한다는 AI의 장난질인가? 아니면 새로운 인물을 갈구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동참하라는 채찍질인가? 어쩌라고 자꾸 피드에 올라오느냐!
언론에 대한 비판 메시지도 강력하다. 전 세계가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데 미디어는 전쟁보도만 주구리 장창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독일뉴스는 전쟁이야기뿐이었다) "전쟁만큼" 심각한 기후문제는 주목받지 못하도 있음을 비꼬는 행렬이다. 대비해야 할 수 있는 일은 차치하고 결론 나지 않는 전쟁만 열 올려 보도하는 언론에게 정신 차리라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경고한다. 우리나라에도 카니발이 있다면 100개의 행렬 중에 90개 정도의 행렬은 언론비판 차량으로 가득 차게 되지 않을까? 이제 포탈을 보면 진저리가 난다. 누군가의 입맛에 맞추어 모조리 변형된 포탈은 언론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 입 아프다. 말해서 뭐 하나...
어린이 당충전- 일 복 터지는 치과의사들
카니발 행렬 중 차량 위에서 혹은 행진을 하며 어리석은 백성 (Jacke)들에게 끊임없이 뿌려주는 사탕, 캐러멜, 초콜릿, 과자 등을 줍는 경쟁은 대단하다. 특히 자녀를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 자기 아이에게 주기 위해 과욕을 부려 눈살을 찌푸리게 할 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변의 아이들에게 골고루 선물이 돌아갈 수 있도록 애쓴다).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나도 아이들 손에 가방을 쥐어주고 행렬 1열에 쭈그리고 들어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단것의 영광을 잡으러 허우적 대던 나날들이 있었다. 약 2시간 남짓하는 행렬에 소리 지르고 환호하면서 집어담은 수확품을 집에서 풀어보면 적어도 3개월간 집안에 설탕 한 톨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정도의 당이 수북이 쌓인다. 아예 야구 글러브나 뜰채를 가지고 나와 낚시질하듯 낚아채는 사람들도 있다. 집집마다 이 행렬을 통해 아이들이 수개월간 먹을 만큼의 사탕과 단것들을 긁어모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카니발이 끝나고 나면 몇 주 안에 아이들의 치과 행렬이 뒤따른다. 엄마 몰래 주워간 사탕을 숨겨놓고 먹다가 충치가 생긴 애들도 있겠고 집에 공짜 간식이 넘치니 마구 집어 먹어 이가 망가지기도 할 것이니 치과의사 선생님들 일복이 터진다. 그뿐인가 애들 단거 먹는 것을 통제하려는 부모와 수확한 단것들의 갖가지 맛을 어서 확인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눈치싸움이 계속된다. (아 이런 데서 해방돼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다가 이제 내 새끼들은 술통에 머리를 박고 혈중알코올 농도를 쭉쭉 끌어올리다 죽을 수도 있는 훨씬 더 위험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음이 떠올라 다시 풀이 죽는다.)
여러모로 독일의 카니발은 경제를 돌고 돌게 하는데 카니발 전에는 행렬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형 슈퍼의 과자와 사탕을 사모아 동을 내고, 백화점과 옷가게는 카니발 코스튬을 사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이 모든 행렬이 끝나고 나면 치과 의사들이 돈방석에 앉게 된다... 관광소득은 물론이고 지역 경제가 불타오른다.
5일간 미친 듯이 부어라 마셔라 목이 쉬어라 노래하고 웃고 떠들고 소리 지르고 진상을 부렸었는데 오늘 바깥을 보니 개미 한 마리 없이 조용하다. 다들 일상으로 돌아가려 노오력 중인가 보다. 자유, 해방, 저항의 이념을 바탕으로 우울한 독일의 회색하늘을 알코올범벅이 되어 지혜롭게 해처 나가는 훌륭한 행사의 끝이 이렇게 저물어 간다.
사진출처:
독일 신문 라이니쉬 포스트
Düsseldorf Kö-Treiben 2024: Die schönsten Kostüme (rp-online.de)
독일 방송 DW 도이치 벨레
Carnival parades in Germany satirize political figures – DW – 02/12/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