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 개념
독일 생활 20년 남짓 늘 루프탄자만 탔다. 선택이라기보다는 남편이 독일 국적기 마일리지를 충실히 쌓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는 결혼 전 비행경험이 많지 않고 비행할 때마다 최대한 싼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돌고 돌면서 여행하던 가난한 여행자였기에 마일리지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었다.
루프탄자를 이용하면 깔끔한(?) 서비스 이상을 기대하면 안 된다. 한국의 서비스 개념과 독일의 서비스 개념은 상이하기에 한국 국적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루프탄자를 타면 불친절하다고 식겁한다. 비행기 안에 들어가면 인사하는 목소리와 톤, 보내는 눈길부터 대단히 사무적이다 (대체 뭘 바라길래?).
오랜만에 나 홀로 여행인 데다 여행사 특가가 나와 아시아나 항공을 타게 되었다. 크으... 체크인부터 전혀 불편 없이 스리스리 진행된다. 노련한 직원분이 나와 서서 한 사람 한 사람 열려있는 카운터로 안내해 주고 (눈만 잘 뜨고 있으면 준비된 다음 카운터가 어딘지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줄 서있는 승객들의 질문에도 바로바로 응답해 주면서 체크인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인다. 물론 루프탄자도 이러한 안내인이 서 있긴 하다. 그저 질문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환대하고 안내하지 않을 뿐. 이렇듯 세련되고 발 빠른 서비스를 경험하는 것은 (독일에서) 한국항공사를 이용할 때만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본인은 아시아나 관계자와 1도 관련 없음을 미리 밝힌다. 가족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도... 그저 다분히 주관적인 양국 서비스 개념의 차이를 논하는 중이다:)
비행기에 오르니 승무원들이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와 아름다운 미소로 “어서 오세요”를 외치며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을 극진하게 환영하며 자리를 안내한다. 무거운 짐을 못 올리는 사람들은 직접 가방을 올려주기도 한다.
이 모든 친절한 행동들은 감사하기 그지없고 그러한 직원분들이 너무나 어여쁘지만 장성한 자녀를 둔 엄마의 눈으로 볼 때 달갑지만은 않다. 내 자식 같은 젊은 여직원들이 승객들을 지나치게 환대하는 모습도, 가녀린 몸으로 보기 좋지만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몸에 딱 붙는 유니폼을 입고 무거운 짐을 머리 위 캐비닛에 올리는 것을 돕고 있는 모습이 짠하다. 벌떡 일어나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야 했다. 그뿐이랴 비행 중에는 버튼만 누르면 끊임없이 물신부름도 해주었다.
루프탄자 직원들이 불친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해야 할 일들을 다 한다. 하지만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언제나 즐겁게 안내하지도 않고 버튼 누르면 바로바로 오지도 않으며 물심부름은 더더욱이 해주지 않는다. (승객들이 그런 요청을 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서비스는 자신이 할 일을 딱 해내는데 그치지 그 이상으로 승객을 환대하며 영혼을 갈아 넣지 않는다.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주 운이 좋은 것이고 자신이 피곤함을 역력히 드러내는 직원들도 더러 보았었다. 물론 기분 좋을 리 없지만 독일에서는 그런 태도가 허용이 된다 (남편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 어제 뜨밤을 누가 망쳤나 보네 하며 농담하고 그냥 넘어간다. 네가 나를 무시하네 어쩌네 하며 자아를 걸고 싸우지 않는다). 누가 불친절한 서비스를 좋아하겠냐만은 사근사근한 루프탄자 직원을 기대하는 독일 사람도 없다.
얼굴 표정, 몸짓까지 너무나 친절한 직원분들의 서비스를 받으며 비행을 하니 12시간 비행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해요 국적기!).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저렇게 까지 천사 같이 서빙해야 하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애처로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승객도 승무원도 서로 친절하면 금상첨화겠지만 승무원의 친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그 친절을 제대로 누려보겠다는 듯 작정한 승객들도 있어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럼 이제부터 아시아나 항공만을 이용할까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나 항공에 비해 비록 간담이 서늘해지는 서비스를 선보이긴 하지만 나에게는 루프탄자를 깊게 신용할만한 사건이 몇 있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가끔 비행 중 공황증상을 보였었다. 비행 시에 멀미를 심하게 해서 보통 12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다 보니 일어나는 사태인데 심했을 때는 호흡곤란이 온다 (지금은 다 커서 다행히 이 사달은 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무뚝뚝한(?) 루프탄자 직원들의 대처는 신속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아이가 곤란에 처해 직원을 부르면 순식간에 3명의 직원이 와서 한 명은 산소호흡기를 달아주고, 다른 직원은 혹시 의사가 필요한지 물어보고, 그로부터 수장급 직원이 비행이 끝날 때까지 수시로 와서 아이가 괜찮은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매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거의 연중행사였다) 루프탄자 직원들은 한결같이 세심했고 진중했다. 우왕좌왕하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잘 내릴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었다.
이제 다 큰 딸아이는 비행 중 문제가 없으니 나는 루프탄자 직원들에게 별 바라는 것이 없다. 그들의 무뚝뚝함(한국 서비스에 대한 상대평가)도 눈치 없음도 비상상황을 멋지게 대응하는 모습을 여러 본 경험한 후로는 커다란 신뢰감에 가려져 전혀 아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아시아나를 타면서 극도의 친절한 서비스를 맛보고는 생각이 오락가락한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나긋나긋하고 정성스러웠던 서비스 맛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뿐인가 그동안 보고 싶던 한국영화들도 줄줄이 사탕으로 보는 호사를 누렸다. 멋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영접했고 한가인 배우의 아름다움과 수지의 청순함, 제주도 풍경이 어우러진 건축학 개론도 드디어 봤다. 도둑들도 정말 재미있었다 - 김혜수, 전지현, 무엇보다 씹던 껌 언니, 사랑해요!
말랑말랑한 서비스에 보고 싶던 한국영화들을 침을 질질 흘리며 눈알이 뻑뻑해지도록 보고 나니 아시아나 항공에 점점 더 애정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장점이 다른 두 항공사를 엄정하게 오가며 타고 다닐 예정이다.
출장으로 오랜만에 "혼자(음하하!)" 한국에 귀국하게 되다 보니 많은 것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우리 문화가 눈부신 발전을 하고, 그 여파로 한국과 한국어에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금의 감정은 십수 년 전 미국살이 할 때와는 많이 다르지만 내 나라가 아닌 곳에서 경계인의 삶은 별것 아닌 일에 살얼음을 걷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한국에서 지내는 3주 동안 역관광의 경험을 기록하면서 오랜 세월 내 나라가 아닌 곳에 살다 생긴 생채기와 유럽문화에 압도되어 시도 때도 없이 무너졌던 자존감들이 다시 펄펄 살아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