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출신 로익과 독일 출신 파울, 한여름 서울에서 시작된 여정
8월의 무더운 서울, 두 명의 유럽 청년이 캐리어를 끌고 기숙사 문을 열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로익(Loïc Hijl)과 독일 출신의 파울(Paul Oebel). 한 명은 K-pop과 K-드라마에 매료되어 이곳을 동경해 왔고, 다른 한 명은 어린 시절 도장에서 배운 태권도 발차기와 함께 한국어를 익히며 이 나라를 꿈꿔왔다. 출신도 관심사도 다르지만, 두 사람은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다. 책과 화면 너머로만 보던 한국은 과연 어떤 곳일까?
2024년 여름부터 1년간, 이 질문을 확인하기 위한 여정이 시작됐다. 동아시아 경제와 정치를 전공하는 로익, 그리고 한국학과 경영학을 공부하는 파울에게 이 경험은 단순한 유학이 아니라 두 문화 사이를 오가는 살아 있는 배움의 시간이 되었다.
첫 만남: 8월의 뜨거운 환영
"도착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8월, 학기 시작 며칠 전에 한국에 도착한 로익은 더위에 대한 첫인상이 강렬했다고 회상한다. "정말 덥더라고요. 그래도 가장 더운 시기는 이미 지났다니 다행이었죠."
파울에게는 건조하지만 더운 독일 여름과 습하고 더운 한국 여름의 차이가 꽤 힘들었다. "첫 주에는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서 천천히 적응해야 했죠."
두 학생 모두 C-House라는 기숙사에 머물렀는데, 재미있게도 맨 위층은 네덜란드 학생들로, 바로 아래층은 독일 학생들로 가득 찼다. 자연스럽게 이들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그곳에서 만들어진 추억들은 지금도 소중하다.
"도착한 첫날부터 정말 재미있었어요." 로익은 여자친구 재희와 함께 일찍 도착했는데, 남학생 전용 기숙사라서 재희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독일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한국에서의 첫 점심을 함께했다. 재희가 데려간 한식당에서 국수를 먹었는데, 테이블에 이미 젓가락과 필요한 모든 것이 놓여 있는 것부터 신선했다. 독일 식당과는 다른 시스템이었지만,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저녁에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는 더 많은 학생들이 도착해 있었다. 학생들은 부엌에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날 저녁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C-House에 사는 한국 학생 한 명이 닭발 집을 추천해 줘서, 생애 첫 닭발을 주문했다.
"맛있었지만 다시 닭발을 먹을지는 모르겠어요." 로익이 솔직하게 말한다.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죠."
적응의 시간: 낯선 것들과 친해지기
파울에게 첫 주는 낯선 환경에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는 시간이었다. 4인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내성적이었던 그는 천천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는 돌이켜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 힘들었던 시간들은 곧이어 다가온 멋진 순간들로 충분히 보상받았어요."
로익은 달랐다. 시차 적응도 빨랐고 금방 리듬을 찾았다. 첫 주에 서울 출장 중이던 삼촌을 만나 등산을 갔는데, 무더운 날씨 속에서도 경치는 아름다웠다. 재미있게도 선택한 등산로가 성균관대학교로 이어져, 우연히 기숙사 친구들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로익이 모두를 위해 주문하고 삼촌이 모두에게 시원한 냉면을 사주셨다.
새로운 일상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다음 날은 친구들과 다이소에 가서 생필품을 샀다. "건조대와 여러 물건들을 들고 지하철로 돌아오는 길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파울의 말이다. 성신여대 주변을 탐험하며 좋은 식당들과 노래방들을 발견했고, 혜화와 명동도 함께 돌아다녔다. 명동 다이소의 모든 층을 빠르게 올라갔다가 여유롭게 내려오는 것조차 즐거운 경험이었다.
우정의 시작: 9월 21일
9월 21일, 로익의 생일을 축하하면서 학생들의 우정은 더욱 단단해졌다. 치킨과 맥주, 소주로 시작한 저녁은 작은 포토부스에 8명이 함께 들어가는 도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기숙사 맞은편 노래방에서 파울은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때 정말 제가 속한 그룹을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진정으로 한국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났죠." 이렇게 하나가 된 8명의 친구들은 11월 제주도 여행에서 더욱 끈끈해졌다.
제주도 모험: 귤과 돌 그리고 한라산
로익이 국제운전면허증을 준비해 둔 덕분에 제주도에서 운전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룹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는 자연스럽게 '그룹 아버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어디든 운전해서 데려다주고, 여행 일정을 관리하고, 말도 안 되는 시간에 우리를 깨웠죠? 우리 조직의 아버지였어요." 파울의 농담 섞인 평가다.
파울에게는 비행기 탑승 전부터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자동 체크인 기계가 그와 친구의 긴 이름을 다 출력하지 못해서, 공항 직원이 손으로 나머지 이름을 적어줘야 했던 것이다.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앞으로 펼쳐질 모험의 전조처럼 느껴졌다.
공항 근처 시장을 탐험하면서 이들의 '귤 모험'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약 2kg의 귤을 사 먹으며 제주도를 누볐다. 성산일출봉에서 일출을 본 뒤 서귀포로 돌아오는 길에 악명 높은 '제주 돌문화공원'을 발견했다. 스탬프 랠리 완료 시 기념 자석을 준다는 말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끊임없는 돌 전시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바로 뒤에 있을게"라며 담배를 피우러 간 대니는 30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스탬프 전시관에 거의 도착했을 때 전화가 왔다. "너희들 어디야?" 그는 겨우 7번째 스탬프에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로익과 친구들은 'ABCD 게임'이라는 한국 어린이들이 즐기는 게임을 했고, 지나가던 아줌마, 아저씨들이 킥킥거렸다. 결국 모든 친구들이 되돌아가 7, 8번째 스탬프를 찾아주고서야 얻은 냉장고 자석은 그날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게 해 준다.
한라산에서의 시련과 성취
새벽 5시, 휴대폰 알람이 칠흑 같은 숙소를 깨웠다. 6시 출발.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우비를 뒤집어쓴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등산이었어요. 비도 비지만, 고도가 오를수록 숨이 턱턱 막혔죠. 계속 뒤처졌어요.” 파울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젖은 바람을 뚫고 한 걸음씩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정상에 도착했을 때, 기대했던 귤맛 소주를 마실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잠시 실망했지만, 그 감정마저도 이룬 성취 앞에서는 사소해 보였다.
하산길에서도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발아래 미끄러운 돌길을 조심조심 내려온 끝에, 운 좋게 택시를 잡아 출발점까지 돌아갈 수 있었다. 친절한 식당 사장님이 빌려준 우비 덕분에 마지막 힘까지 짜내며 따뜻한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등산은 정말 지옥 같았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다시 함께 가고 싶어요. 아주 성공적인 첫 여행이었어요.”
파울의 회고다.
학생에서 가이드로
파울의 가족은 10월 중순, 중간고사 직전에 한국을 찾았다. 그는 지하철을 알려주고, 편의점에 빠진 동생을 데리고 경복궁과 국기원을 돌았다. 온 가족이 태권도를 하는 만큼 국기원 방문은 특별했다. 그날 밤, 파울은 가이드 모드를 접고 0시 59분에 에세이를 제출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4월에 온 로익의 부모님은 불국사 템플스테이를 체험했다. 새벽 108배와 해변 운동은 유연성이 부족한 로익에게 고됐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그는 수업 때문에 먼저 서울로 돌아갔다가, 제주도에서 부모님을 다시 만나 1년을 살아본 사람의 눈으로 한국을 소개했다. 마지막 밤, 롯데타워 꼭대기에서 저녁을 먹으며 조용히 작별했다.
부산의 추억: 용기 있는 자들만 물속에 뛰어든다
겨울 학기 후, 날씨가 풀리자 두 학생은 부산 바다로 향했다. 아무도 물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둘은 과감히 뛰어들었다.
“들어가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더라고요. 물이 진짜 차갑더군요.” 로익이 웃었다.
도시 산책, 어시장, 해변은 모두 훌륭했다. 생선은 접시 위에서 움직일 정도로 신선했다.
“유럽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죠.” 파울이 말했다.
마지막 순간들: 작별과 약속
로익은 재희의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강릉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에서의 1년을 마무리하기에 완벽했어요.” 그는 그렇게 말했다. 파울도 “두 학기는 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독일에 돌아와서도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과 다시 모였죠”라고 회상했다.
두 학생의 여정은 단순한 교환학생 경험을 넘어선다. 낯선 땅에서 부딪히고 적응하며, 이들은 관광객이 아닌 ‘한국의 일부’가 되었다. 새벽 한라산, 차가운 부산 바다, 부모님을 안내한 가이드의 순간들까지—그 시간들은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새로운 문화를 얼마나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문화를 얼마나 따뜻하게 다른 이에게 건넬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