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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현 Jan 04. 2023

미세 노동자의 하루

매일 하루는 데이터 라벨링 사이트를 훑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A 사이트에는 일이 있고, B 사이트엔 일이 없구나. C 사이트의 일은 오후 2시에 선착순으로 오픈되는구나.' 따위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 그럼 A 사이트에서 일을 하다가 오후 2시가 되면 C 사이트로 넘어가는 것과 같이 당일의 전략을 짤 수 있었다. 데이터 라벨링을 처음 시작할 때는 위와 같은 계획을 짜는 것도 사실 재미있었다. 짧은 시간 내에 좀 더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나 스스로 계획을 짜고 전략적으로 움직인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데이터 라벨링 업무라는 게 사실 키보드와 마우스에 올려놓은 손과 모니터를 바라보는 눈으로 빠르게 반복하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너무 긴 시간 작업을 하게 되면 몸에 무리가 온다. 손가락 관절이나 손목에 통증이 오기도 하고 눈이 시큼해져 하루 이틀 정도 눈이 뿌옇게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작업 시간을 정해 두어야 했다. 내 경우엔 물체의 경계를 따라 선을 그려야 하는 세그멘테이션 작업은 연속 작업으로는 1시간 30분이 한계였다. 눈이 튀어나오고 손가락 마디가 굳는 것 같았다. 챗봇 대화문 생성 같은 텍스트 생성 작업은 그나마 좀 오래 할 수 있었는데 내 창의력은 늘 2시간이면 바닥을 드러냈다. 단순히 눈으로 이미지를 확인하고 클릭만 하는 단순 반복 작업도 30분 정도 진행하면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아무튼 작업 별로 최대 작업시간을 정해 두고 작업을 계획했다. 오전에 작업을 확인하고 오전 작업, 오후에 잠깐 출근하는 다른 업무를 하고 왔다가 저녁에 다시 저녁 작업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라는 거다. 옆에 앉은 사람에게 억지 미소를 짓지 않아도 되고 부담스러운 동료와의 커피 타임이 없다는 것. 출근길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되고 등 떠밀려 우르르 점심을 먹으러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손목은 늘 아프고 눈은 항상 시렸지만 모든 일이 다 그러려니,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50원, 100원 같은 소액의 리워드나 크레딧도 티끌을 모으니 작은 동산 정도는 됐다. 그렇게 하루하루 혼자만의 동산을 만드는 재미로 작업을 계속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이 미세노동을 멈추고 생각이란 걸 하게 됐다.


따지고 보니 여러 사이트를 전전하는 건 나의 똑똑한 전략이 아니었다. 그저 라벨링 사이트의 작업 일정에 내 계획을 맞춘 것뿐. 워낙 여러 사이트에서 작업을 하다 보니 스케줄링이 복잡해져 뭔가 대단한 계획을 짜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뿐이다. 또 작업 타입 별로 내 한계 시간을 정해둔 것 역시 나의 효율적인 전략 짜기가 아니었다. 그저 한두 시간이면 국소적으로 몸에 무리가 오는 일을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하고 있었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청기, 백기를 외치는 누군가의 구령에 따라 나는 100번이고 1000번이고 청기나 백기를 드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길어야 한두 달 스폿성으로 오픈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내가 작업을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해당 작업을 다 해버린다. 즉, 내가 지금 일하지 않으면 내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는 구조. 그러니 손목이 아파도, 눈물이 흘러도 짧은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작업을 해야 하는 환경에 내몰리게 된다. 데이터 라벨링 사이트는 작업자로 하여금 무조건 작업을 많이 하도록 채찍질하지는 않는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 않은가. 채찍질하는 것은 작업자 본인이다. 일이 있을 때에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빛이 반짝거리는 모니터를 토끼눈을 하고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언제 오픈될지 모르는 프로젝트.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프로젝트. 갑자기 오픈되고 갑자기 사라지는 프로젝트에 익숙해지려면 수시로 데이터 라벨링 사이트를 확인해야 한다. 현대판 벼룩시장이다. 오랜 시간 일을 찾고 기다려서 작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단가가 좋고 난이도가 낮다 싶으면 한 번에 많은 작업자가 몰려서 일은 금세 사라지게 된다. 


하루 종일 일을 찾고, 채찍질하며 작업을 하는 하루. 없어진 '꿀' 작업을 그리워하고, 새로 열린 작업의 낮은 리워드에 분노하며 미세 노동자의 하루는 매일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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