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이건 내가 정말 원하던 익숙함이었을까?'
두 달 전, 나는 내 인생에서 세 번째로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복직은 아이들을 출산한 뒤였다.
세 번째는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에 맞춰 휴직을 했고 그 시간을 마친 뒤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이번 휴직 때는 유난히 주변 사람들로부터 '회사로 다시 돌아갈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휴직이 시작되기 전까지 하루하루 허덕이듯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라고 답하곤 했다.
그러다 휴직 기간이 끝나갈 무렵엔 몇몇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는 지옥으로 돌아가려고요."
휴직을 결정하던 시기의 나는 내 일상에 지쳐있었다.
내가 살아내야 하는 일상이 버겁게 느껴졌다.
집에서는 넘치는 회사일로 아이들을 충분히 챙기지 못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반대로 회사에서는 충분히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왜, 어딜 가나 미안한 사람이어야 하지?'
이런 생각을 달고 살던 그 시절의 나는 그야말로 지옥 속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말,
그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을까?
내게는 선택지가 하나도 없었던 걸까?
그런데도 왜, 나는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걸까.
아이들이 어릴 때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시기가 있다.
오죽하면 아이를 안고 화장실에 가거나 문을 열어둔 채 볼일을 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기본 중의 기본, 먹고 자고 싸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 시기에는 정말로 시간이 없다.
그때부터였다.
'나중에 아이들이 크고, 여유가 생기면...'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기 시작한 것도.
그러다 몇 년이 지나고 아이들은 스스로 해낼 줄 아는 게 많아졌다.
그에 맞춰 나도 기본적인 권리는 챙길 수 있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내 마음속엔 같은 바람이 남아있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아이들이 크고, 여유가 생기면'이라는 상황이 내게 찾아왔는데도 나는, 무섭게도 같은 말을 되뇌고 있었다.
예전보다 여유가 조금 생겨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갓난아기를 키우던 마음에 머물러있었다.
언젠가의 미래만 막연히 바라며 살아온 그 일상에 익숙하다 못해 잠식당하고 말았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다시 또 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나.
이런 나를 보며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깨달았다.
간절히 원하는 것보다, 이미 맛본 '익숙함'이 내게는 더 달콤하다는 걸.
원하는 건 아직 무슨 맛인지 경험해보지 않아서 모르니까.
‘지금보다 쓴 맛이면 어떡해? 더 지옥 같으면 어떡해? 그럴 바엔 그냥 이미 아는 불편함을 택하자.‘
내가 주체적으로, 좋아서 선택한 것들에 익숙해지는 건 자연스럽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처음엔 분명히 싫었고, 그리고 여전히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익숙하다는 이유 하나로 받아들인 것들이 있었다.
이전보다 조금은 내 시간이 더 늘어났는데도 여전히 아이들이 어려서 어렵다는 핑계가 마음속에서 올라온다.
매일 아침 주차하던 위치가 너무 멀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다음 날에도 또 같은 자리에 주차를 한다.
마감 기한 압박을 심하게 줬던 예전 직장 상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가 건네는 무해한 반가운 인사에도 ‘웬일로 친한 척이야?’라며 익숙하게 투덜거린다.
아는 맛이 무섭다더니 원치 않았는데도 익숙해져 버린 것들은 어느새 내 삶에 하나둘씩 스며들어버렸다.
지금 내가 익숙해져 버린 것들은 정말로 내가 원하던 것들이었을까?
내 일상이 어떤 것들에 둘러싸여 있길 바라는가?
또 한 번 익숙한 자리로 돌아오긴 했지만, 이번엔 낯선 질문 하나를 품고 돌아왔다.
이 질문이, 나를 '내가 선택하는 익숙함', '핑계 대지 않는 익숙함'으로 이끌어주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