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델몬키 May 07. 2023

너의 이름은

작명과 운명 그 어드메...

우리 때만 해도 친구 중 지훈, 슬기, 지혜 정도는 최소 2명씩 있고 그랬다. 큰지훈, 작은지훈, 6반 슬기, 8반 슬기 사이에서 나는 운 좋게 학년의 유일한 현아로 살아갈 수 있었다.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뒤늦게 한 친구가 개명을 하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깜상현아'로 분류되었다. 친구들이 "현아야"라고 부를 때마다 반짝이던 내 눈빛은 나보다 피부가 흰 현아임을 깨닫고 짜게 식었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네, 하고 달려가면 너 말고 네 아범~" 동요 속 예솔이의 심정을 나는 안다.


새로운 현아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나는 친구들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것으로 이름을 각인시키려 했다. 이러한 나의 노력은 빛을 발해 선생님들의 레이더에도 딱 걸렸고 '교우와의 다툼이 잦음'이라는 생활통지표로 결실을 맺었다. 성인이 되고 솔로 가수 현아, 그룹 가수 현아, 비행기 회사 현아... 쟁쟁한 현아들이 줄줄이 거론되면서 나는 차차 현아 자리를 내어놓았고, 이제는 현아계의 최약체로 살아가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 하지만 가끔, 아니란 걸 뻔히 알면서 네이버에 내 이름을 한 번씩 검색해 보곤 한다. 이런 나에게 친구는 조언한다. "야, 조용히 잘 사는 게 최고야. 이름 알려지면 탈탈 털려. 너 자신 있냐?" 아... 교우와의 다툼... 생활통지표... 자신이 없다. 하지만 잘 살지도 못하는데 이름 석 자도 알리지 못한 나는 여전히 돈보다는 명예가 더 얻기 쉽게 느껴진다.


이 미지. 이것이 초등학생인 내가 생각한 최선의 새 이름이다. image. 생각하시는 그 단어 맞다. '눈높이 영어'를 열심히 푼 덕분에 영어로 작명까지 할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미지'라는 이름의 친구를 만나면서 산산조각 났다.


일기장에 그렸던 미래(1994년 작)... 이룬 거라곤 몸무게뿐

중학생이 되고 나의 이름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황계영 작가의 <오디션> 만화책을 만난 것이다. 등장인물 중 '장달봉'이라는 인물에 내 가슴이 뛰었다. 작가가 몹시 매력적인 남자를 그린 다음 달봉이란 이름을 붙인 순간 여중생의 판타지에 불이 확 붙어버린 것이다. 너무 잘생겼는데 이름이 달봉이래. 취향을 바꾸자 세상이 달리 보였고 그저 이름이 순박하다는 이유로 봉철이라는 아이와 썸을 타기도 했다. 그렇게 촌스러운 이름에 대한 로망은 2011년에 입양한 강아지의 이름으로 꽃을 피웠다. 세봉이. 암컷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2014년, 행운은 연속으로 찾아왔다.


오.백.룡.

나의 남자친구였고, 지금은 남편인 사람의 이름 석 자.

나만의 달봉이가 내 인생에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그간 남자친구들 중 이름이 좀 유별나다 싶은 애들도 약간 생소한 발음이나 단어 조합의 문제였지 이런 장르는 아니었다. 오백룡, 오뱅용, 오뱅료이. 이리저리 갖고 놀아도 입에 착 감기는 발음. 웅장함과 촌스러움의 적절한 배합은 또 어떤가. 마치 하나의 이름에 화랑의 기백과 상놈의 무식함이, 장군과 노비의 삶이 반반씩 섞인 듯하다.


가끔 이름만으로 백룡이가 주목을 받을 때면 우쭐해지는 동시에 살짝 샘도 난다. 그저 이름을 불러줬을 뿐인데 누군가에게 살짝 미소를 자아내는 이름이라니... 특히 시종일관 무뚝뚝하던 사장님이 "멋진 이름이네?"라며 알아봐 줄 때면 왜 내 이름은 왜 이천봉이나 이태백이 아닌지 억울하기까지 하다.



전 편집장님은 당시 남자친구였던 백룡이의 이름을 확인하고 친히 전화까지 주셨다. "현아씨, 남자친구 생긴 거 축하해. 이름이 아주 멋져. 북한에서 유명한 인물인 건 아시오?"


압니다.

남편을 만나자마자 떨리는 마음으로 이름을 검색해 보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북한 장군이 떠서 살짝 김이 샜기 때문이다. 북한 백룡과 남한 백룡이로 2차 분류되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이 사실을 꽁꽁 숨기고 있었는데 잡학다식한 편집장님만큼은 속일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또다시 북풍이 불어닥쳤다.


두 달 전, 아파트 소독을 실시하던 때다. 나는 출근을 했고, 집에 있던 백룡이에게 소독 완료 확인차 서명을 해달라고 했단다. 백룡이가 정직하게 이름을 적자 작업하신 분이 수줍게 웃으시며 "이 사람 이북에서 엄청 유명한 사람"이라고 알려줬단다. 알고 보니 그분도 북한에서 오셨다고. 아아. 될명될. 이 이름은 남과 북에서 돕는구나. 배가 아프다.


그러나 어릴 때는 누구든 이름 공격에서 자유롭지 않는 법. 배민경이 배꼽티가 되고, 이현아가 이쑤시개가 되는 초딩 세상에서 오백룡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오백원'이라는 놀림에 백룡이가 빼에 울고 들어오면 아버님은 이렇게 타일렀다고 한다.


"아들아! 니 이름은 오백(百) 마리 용(龍)이 따르는 어마어마하게 멋진 이름이다!"


오늘 아침 Mr. Hundred Dragons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동료들이 내 이름 멋있대. 진짜 그래?"

입사 2주 차, 한창 이름(만)으로 주목받을 때겠군. 뻔히 알면서, 원하는 답은 절대 줄 수 없다.

"그건 '오'씨 성이 살린 거지. 만약 니가 최백룡이라면?"


그럼에도 여전히 남편의 이름은 나의 자랑거리다. 우리가 운명인 이유는 28가지 정도 되는데 그중 이름도 단단히 한몫한다. 존재만으로 효도하는 늦둥이처럼, 이름만으로 내게 이야깃거리를 안겨주는 사람은 역시 남편밖에 없다. 백 마리의 용이 따르는 남자와 평생 촌스러운 이름을 흠모해온 여자의 2세 이름은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후보군이 있지만 확실한 건 호락호락한 이름은 아닐 거다.


유효기간: 오백년


작가의 이전글 시대역행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