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칸 사람들의 비밀
학창시절엔 운이 좋았던 거였다.
초, 중, 고 모두 거리가 가까운 학교로 배정을 받았고, 자라나는 청소년 모두가 걸어서 등교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지금은 하루에 3시간을 지하철에서 보낸다.
열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설 때 '오늘은 앉을 수 있을까?' 두근대기 시작한다.
내가 폰을 보는 것 같나? 아니다. 너무 초조해서 그냥 막 아무거나 막 누르고 밀고 그러는 중이다.
아주 이른 아침 시간의 지하철 꼬리칸에서 거의 매일 만나는 사람들.
우리 서로는 누가 언제 내리는지를 훤히 알고 있다.
대부분은 앉아서 가지만, 간혹 앉을 자리가 없을 땐 모자 쓴 마른 아저씨를 찾는다.
늘 같은 역에서 내리기 때문이다.
살짝 최양락 머리 같은 아저씨도 금방 내리시는데, 대신 출석이 좀 들쑥날쑥하다.
치질 수술을 한 건지 늘 삐딱하게 앉는 여성분, 그분 앞 괜찮다. 자주 안보이는 게 흠이지만.
아무튼 모자 쓴 아저씨가 상당히 규칙적이고 안정적이다. 소확석. 작지만 확실한 좌석 하나인 것이다.
이건 그 새벽 이슬처럼 눈꼽을 달고 탑승한, 머나먼 역 승객들만의 작은 비밀이었다.
나는 그 모자 쓴 아저씨를 마음 속 든든한 후견인처럼 여겼었다.
가끔 반대쪽 자리에 여유롭게 앉아 모자 쓴 아저씨의 좌석 승계 장면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자리에 앉는 사람의 뒷모습에서 "아싸~!"소리가 나는 것 같다.
나는 이 질서와 평화가 영원하길 바랐다.
그러나 왠지 가벼워보이던, 그래서 불안했던,
반곱슬에 호리호리한 아저씨(이분도 고정 멤버임)가 사고를 치고 만다.
한 젊은이가 앉으려던 자리에 반곱슬 엉클이 좀 무리하게 앉았는데
본인도 민망하고 멋쩍었는지 굳이 안해도 될 말을 했다.
"아, 잠깐만 기다리세요. 저 분(=모자 쓴 마른 아저씨) 곧 내립니다."
너무 분했다. 그건 우리 꼬리칸의 영업 비밀인데, 그걸 왜 맘대로 누설하세요???
그날 나는 수영장의 텃세를 마음 속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모자 쓴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닌지 걱정하는 내가 웃겼다.
이제 나는 입석의 혼돈 속에 던져지겠지.
그러나 다음 날 아저씨의 검은 캡모자가 보였을 때 나는 "아저씨! 어디 가셨어요? ㅠㅠ"하며 응석을 부리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요즘 그 아저씨, 캡모자에서 비니모자로 아이템을 바꿨다.
열차에 타자마자 바로 찾기가 살짝 어려울 수 있다.
나도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으니까.
그렇게 몇 명이 아저씨를 놓치고 진로를 고민하는 사이에 내가 그 아저씨 앞에 탁 서서
작지만 확실한 좌석 하나를 지킨 기쁨을 만끽한다.
아마 이 영업비밀도 곧 탄로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