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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성국 Jan 11. 2022

멸공의 횃불

군대 훈련소에 들어가면 먼저 개인을 지우는 과정이 시작된다.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큰소리로 나를 모욕한다. 뚜렷한 근거 없는 모욕을 견디게 하고 신체적 가학을 견디게 한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볼 에너지가 없어질 때까지 그것을 반복한다. 전시엔 왜를 따질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판단하기에 그것이 정당하냐 정당하지 않느냐는 중요치 않다. 군대에서 모든 개인이 의사결정에 개입한다면 패배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곳에선 끊임없이 군가를 부르게 한다. 부대원 모두가 합창한다. 집단주의를 강화하기 위함이다. 나보단 집단이 우선이다. 그중에 '멸공의 횃불'이란 곡이 있다. 그 노래를 부르지 않을 자유는 그곳에 없었다.


"전우여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유년기를 거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사는 삶에 익숙하다. 군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그곳엔 '나'가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왔던 사람들이 이제 상관의 가치관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상관의 명령이 나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따라야 하는 게 군대다. 민주적인 군대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전시에 자국민의 목숨이 위태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 민주적 합의를 거치며 지지부진하다가는 다 죽을 수 있다. 그래서 군대에선 반민주적 의사결정이 정당화된다.



공산주의가 자유를 해치는 것은 그것이 극단적이고 독선적이어서다. 그런데 반공주의도 극단적이고 독선적이며, 자유를 해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와 다르지 않다.


멸공과 자유는 상충한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자 멸공을 외치는 것이라면 이는 모순이다. 공산주의를 멸하자는 것은 공산주의를 표현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입맛에 맞는 표현은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지만 듣기 싫은 표현은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표현의 자유라 할 수는 없다. 이는 표현의 자유를 해치는 표현을 할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이며, 모순이다.


나경원 전 원내대표는 어제 장 보는 사진과 함께 "오늘 저녁 이마트에서 멸치, 콩, 자유시간. 그리고 토요야식거리 국물떡볶이까지. 멸공! 자유!"라는 게시물을 올렸습니다.

출처: 윤석열 '멸치, 콩' 장보기에 난데없이 '멸공 인증' 릴레이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6598598&plink=ORI&cooper=NAVER


우리나라는 공산주의 국가와 휴전 중이기에, 여전히 반공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사회의 어른 중 많은 사람이 과거에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랐다. 우리는 스탈린, 모택동, 북한의 김 씨 일가의 악행은 익히 들어왔다. 그러나 스탈린, 모택동만큼이나 많은 사람을 학살한 수하르토, 피노체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낯설다. 공산주의를 독재 및 학살과 연관 짓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학살이 반공주의자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 학살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와 독재를 동의어로 여겨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들의 악행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려 한다.

 

무언가를 멸하려면 반드시 상당한 폭력을 동반한다. 나쁜 것을 멸하려 한대도 그렇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멸하자는 당위는 동의할 만하게 들린다. 그러나 그것을 멸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한다. 중국처럼 아예 도시를 통째로 봉쇄하면 코로나를 더 빨리 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는다. 공산주의는 나쁘다는 주장에 모두가 동의한다 해도, 공산주의를 멸하자는 주장에 모두가 동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정치인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대중들이 듣기에 자극적인 말을 찾아 하는 것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틀렸지만 자극적인 말을 남발한다는 의미에서 멸공과 자유를 함께 외치는 것은 선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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