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사에 혜성 같이 빛났던 광휘로운 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4차원의 영성 계발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 후 세계선교 일궈내
가난했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관통하며 혜성 같이 빛났던 광휘로운 별 하나가 86세 향년으로 소멸했다. 그 휘황찬란했던 별빛 때문에 6.25 전쟁의 상흔 후 척박하며 병들고 가난했던 사람들은 삶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긍정의 발자취로 삶의 환경을 개선하며 발전해나갔다. 단일교회로는 기네스북에 등재된 70만 성도의 목회자요 세계적인 복음전도자로 지구촌 70여개국에 절대긍정과 절대희망의 메시지를 전한 그가 바로 조용기 목사이다. 그는 어제 아침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지상에서의 여행을 모두 마치고 안식에 들어갔다.
그는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부친 조두천씨와 모친 김복선 여사의 5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학, 유교, 불교철학에 해박한 부친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고, 그런 문화적인 배경 속에 살았지만 그의 생애가 완전 새롭게 전환된 것은 17세에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폐결핵 때문이었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에 의지하고 온갖 노력을 해도 해결하지 못해 자포자기하던 그에게 어느 날 병문안을 온 누나의 친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그는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하면서 부흥집회에서 미국 선교사의 통역을 맡기고 했고 향학열에 불타며 해외 유학을 다녀와서 교수의 꿈을 가지고 행복한 인생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러나 죽다 살아난 그에게 개인적인 성령충만한 영적 체험은 그의 길을 목회자로 부르고 있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6년 서울에 올라와 순복음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고, 바로 여기에서 후에 목회의 동역자요 장모가 된 최자실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순복음신학교를 1958년 졸업한 조목사는 최목사와 함께 5월 18일 서울 변두리 대조동 최목사의 집에서 최목사의 세 자녀들과 함께 창립예배를 드렸다. 성도들은 겨울에도 천막 교회에서 추위와 싸우며 밤새 철야기도와 새벽예배를 드렸고, 낮에는 대조동 일대를 다니며 전도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지만 멸시와 냉대만 받았다. 설교는 3개월이 지나자 바닥났고, 성도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들려줘도 성도들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끼니 해결도 힘든 사람들에게 전도하자 “여기 지금 내가 사는 곳이 지옥인데 그딴 천당 지옥 얘기 더는 하지 마이소”라는 퉁명스런 대꾸만 돌아왔다. 국가의 제대로 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이군인들은 허구 헌 날 술병을 들고 와 “돈을 내놔라!”고 소리 질렀다. 그는 고심하던 끝에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나가며 놀라운 진리를 발견했다. 복음은 당사자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병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며 병을 고쳐주셨지 참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 속에서 그는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자 성도들의 병이 낫기 시작했고, 알콜중독자가 새사람이 돼 취직하고 가정을 잘 꾸려나가게 되었다. 그의 희망의 메시지에 드디어 사람들은 반응하기 시작했다. 믿음을 가지고 용기를 낸 사람들은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취직해서 결혼했고, 가게를 꾸려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노라”(요한3서 2절)는 그의 목회의 기치가 되었다. 조목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케 되는 삼중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했고,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 각종 질병이 치유되었으며, 성도들의 삶은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부흥일로에 놓였을 때 영장이 나와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중 심한 장질환으로 인해 수도육군병원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대수술을 받고 대전 63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자 결국 7개월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의병 제대하게 되었다. 이후에 조용기 목사의 인도아래 교회는 부흥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다. 1968년에는 성도수가 8천여명 되었다. 하지만 날로 성장하는 교인들을 수용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자 조목사는 여의도에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를 신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여의도는 모래벌판이었고 교통편도 제공되지 않던 미개발지였기에 주위에서는 무모한 계획이라는 반대와 비난이 쏟아졌다. 게다가 총 건축비가 8억원이 드는 공사였지만 교회에는 1백만원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목사는 기적의 하나님만을 믿고 성도들과 함께 건축헌금 작정에 들어갔다. 이에 당회도 그 뜻을 받아들여 대지대금을 어음으로 지불한 후, 1969년 4월에 성전건축을 시작했다. 여의도 새성전의 건축 공사가 시작하자마자 중동의 석유파동이 일어나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가 하락했다. 이로 인해 건축자재 값은 폭등하고 많은 성도들이 실직하여 헌금이 줄어들고, 은행의 융자도 축소되어 부채 압박이 극에 달했다. 여기에 건축 기술상의 문제까지 겹쳐서 교회건축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조목사는 매일 밤 골조만 앙상하게 올라간 성전 지하실에서 뚝뚝 떨어지는 녹물을 맞으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다가 지쳐서 시멘트 바닥에 쓰러질 때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자 성도들 사이에도 뜨거운 마음으로 교회 살리기 운동이 일어나 매일 저녁 수백 명의 성도들이 지하실 바닥에 함께 엎드려 간절히 금식하고 기도했다. 그 결과 성전은 다시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하여 마침내 1만명을 수용하는 성전이 완공되어, 1973년 9월 23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여의도순복음교회 헌당 예배를 드렸다.
https://youtu.be/qtqSCmSGeWE
조용기 목사가 세계적인 위대한 목회자가 된 것은 그의 끊임없는 학구열에 있었다. 독학으로 영어사전을 암기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또 성경에서 오중복음 삼박자 축복의 비결을 발견하고 그의 신학으로 삼았다. 한국교회가 신학적인 교리에 깊이 매몰될 때 성령께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성령충만을 강조했다. 기도 가운데 4차원의 영성을 깨닫고, 생각 믿음 꿈과 말에 대한 확고한 자화상을 그리고 삶에 적용했다. 4차원의 영성을 가는 곳마다 널리 퍼뜨렸다. 그의 '4차원의 영적세계'란 책은 하도 많이 판매돼 아프리카에 집회를 할 때면 조용기 목사의 얼굴은 몰라도 그의 책을 읽어봤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비행기를 타고 지구 200바퀴 넘게 돌만큼 해외성회를 다녔고, 브라질에서 150만의 인파가 몰렸을 때 헬기를 타고 단상에 내려 설교한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여의도광장의 대형집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업그레이드 되는 발판을 닦았고, 기독 일간지 국민일보를 창간했고, 자선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소외되고 병든 이들의 친구가 돼주었다. 한 세기동안 대한민국만 아니라 지구촌을 누비며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 영산(靈山) 조용기 목사를 이 가을, 애잔한 마음으로 추념하며 기린다.
박정관 굿뉴스울산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