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부락 근처 만수밭이 어릴 때 필자의 놀이터였다. 동네에서 불알친구들과 막 뛰어놀던 그때는 그게 개구쟁이라는 말에 해당되는지 모른다.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꼬맹이들은 어느새 몰려들어 함께 오징어놀이·자치기·구슬치기를 했다. 또 연을 날려 띄우며 논밭에서 메뚜기 잡아 구워먹고 종횡무진 싸돌아다녔다. 정신없이 뛰어놀던 그때는 뭔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보면 아련하게 그리움이 되어 그런 시간들이 추억으로 소환된다.
전후 농촌에서 살던 부모들은 정든 고향의 부모님을 뒤로하고 학업과 직장과 결혼하기 위해서 도시로 이주했다. 부모들은 아등바등 악착같이 생활전선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아침 해 뜨자마자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또 저녁 어스름이 돼서야 집에 돌아오게 되지만 그때도 급히 자녀들 밥상을 차려주어야 하고 남편 뒷바라지를 도맡았다. 언감생심 자녀들 육아와 교육은 일찌감치 본인의 한계를 벗어난 일, 그저 자식들이 무탈하게 잘 자라주는 것만 해도 위안이 되었었다.
‘오늘도 무사히’를 마음속으로 날마다 간절히 외치며 귀가해서 아무 일없었다면 그저 감사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자녀들이 초등학교를 지나 중·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야 일손을 드는 뒷바라지를 해주니 크게 도움이 되었다. 생일케이크라는 말이나 생일잔치라는 말보다 밥상에 미역국이 올라오면 오늘 가족들 누군가 생일인지 알게 되는 그런 가난함 살림살이였다. 그래도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저 당연한 일인 듯 여기며 지나오다보니 나라의 산업화와 경제발전과 더불어 여러 가지 혜택이 자동으로 따라오게 되었다.
어느 해 추석 때인가. 큰누나의 제안으로 가족사진을 찍었을 때인데 필자가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갔는지 안 갔는지 기억이 또렷하지 않다. 그런데 ‘추억사진관’ 글씨가 선명하고 함께 가족사진이 있는 걸 보면 간 것이 확실하다. 사진 속에는 사촌누나도 함께 있는데 큰 누나 말로는 우리 가족과 한동안 함께 지냈다고 한다. 필자의 기억에는 없는데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문상 온 사촌누나가 그리 서럽게 울었는가보다. 가족사진에서 중년의 아버지는 양복을 입은 채 근엄하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어머니의 어깨에 손 올리고, 자녀들은 앞줄에서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필자는 마치 갓 입대해 군기 넘치는 신병처럼 꼿꼿한 자세로 서있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 사진 속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덜하지만 양친이 모두 소천하고 나면 사진 한 장의 추억에서도 애잔함이 잔뜩 묻어난다.
집성촌(集成村)이라는 말이 있는 줄도 몰랐지만 학교에서 배우고보니 내 부모들의 부모님이 계신 고향이 집성촌임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여천초등학교를 다니고 작은 누나가 중학교를 다닐 때 13번 버스를 타고 도심의 울산역으로 향했다.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신 영천 외갓집으로 가는 비둘기호를 타면 마음은 벌써 그곳에 도착해서 신났고, 눈길 주는 차창 밖으로 사물들이 휙휙 지나갔다. 외갓집에서 외할아버지에게 큰 절로 인사하고, 하룻밤 자고나면 다음날 동네 꼬맹이들과 저수지에서 낚시도 하고, 물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온 들판을 다니며 신나게 뛰놀았다. 그 시절 3박4일의 시간은 언제 지나가버렸는지...
가난했지만 가난인줄 몰랐고, 그리 넉넉하지 않았어도 부족한 줄도 몰랐다. 그 당시는 일부 부자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엇비슷한 처지였다. 회사 출근하는 아버지의 자가용은 짐자전거였는데 저녁 무렵이면 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퇴근해서 자식들의 이름을 호명하면 그게 무사한지를 체크하는 점호였다. 맞벌이하는 어머니도 야음체육관 큰 길의 회사 통근버스에서 퇴근했는데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챙겨가는 것이 막내인 내 담당이었고, 고생한 어머니와 함께 발맞춰 총총히 집에 돌아왔다.
당시 파전 한 장을 굽더라도 이웃 담장 너머로 배달을 했고, 이웃들도 팥죽을 끓여 나누어 먹는 상부상조였다. 신년 초 설날에는 떡국을 끓여먹었고, 황금들판의 추석 때는 맛난 것이 많았다. 추석 때는 뭐니뭐니해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송편을 빚으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솥에서 꺼낸 모락모락 김나는 송편을 나눠먹던 필자는 어느새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이맘때. 추석, 가을밤 높은 달이 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