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야 산다. 끝까지 간다.> 울산광역매일 원고
기독교 이념을 담은 <사랑, 진실, 인간>을 사시로 1988년 12월 10일에 창간된 신문이 국민일보다. 한국 개신교의 중대형교회와 기업체의 후원으로 출발했는데 기존의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의 매체보다 뒤늦은 출발은 아킬레스건처럼 약점이다. 새로운 독자를 창출하고 기존의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지대한 노력이 필요했고, 현재까지 6000억 원 가까운 재정이 투입됐다. 국민일보는 여러 곳을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여의도에 1998년 사옥을 지어 둥지를 틀었다.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선진판형을 도입하여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사실 국민일보의 창간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 대통령이 성경책에 손을 얹고 취임하는 미국 같은 기독교 국가라도 기독교일간지는 발행이 어렵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각각의 특색 있는 신문이 있지만 워낙 지역이 광대하기에 그렇다. 국민일보는 현지 인쇄를 위해 대구에 공장을 설립했는데 수 년 전 공장을 폐쇄했다. 올 컬러 선진판형의 독특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일반신문 크기의 대판을 같이 찍을 수 없었기에 다른 지역신문이나 주간지 월간지 등의 외주를 받지 못했다. 값비싼 윤전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서너 시간 인쇄하는 것으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에 결국 폐쇄하게 된 것이다. 반면 대구지역의 <벼룩시장>은 100억 원의 판권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아울러 그곳의 윤전기는 경상도의 어지간한 일간지,주간지, 월간지를 인쇄하고 있으며 대전 이남으로는 가장 큰 규모라고 들었다. 자신들의 정보지를 인쇄하는데 그치지 않고 외부로 눈을 돌리고 경계를 넓혀 수많은 이익을 창출해 낸 것이다. 사실 신문은 정보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정보지의 참신한 기획과 발상의 전환은 놀랍다.
나는 5년간 전국을 다니며 국민일보 문서선교사로 확장하는 영업활동을 했다. 그때 유명한 강사로 전국을 다니며 부흥의 바람을 일으키는 목회자의 운전 비서를 하면서 값비싼 경험을 했다. 경북 문경 출신의 그 목회자는 고신대학교 신학생 시절 중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했고, ‘꺼져 가는 등불’이 별명이었다. 죽음을 앞둔 가난한 신학생의 기도는 필사적이었고, 마침내 그는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했다. 300명의 교회에 담임으로 청빙됐을 때 그는 외부활동을 자제하고 교회 사역에만 전념하라는 어느 장로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손수 운전을 하면서 부흥회를 초청하는 전국 방방곡곡을 달려갔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 성도들의 반응이 좋아 집회요청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마침내 CTS기독교텔레비전에 전파를 탔고, 14년간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CBS 기독교 방송에서도 러브콜이 와 10년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 한국교회의 부흥성장은 끝났다는 소리가 교계 안팎으로 쏟아지고, 교회를 건축하다 부도나는 교회들이 부지기수를 이루는데도 불구하고 10년 사이에 예배당을 두 번이나 봉헌했다.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알뜰살뜰 섬세하게 내실을 기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마디로 그는 목회에 미친 행복한 사람이다. 외부에 나가 있어도 성도들은 방송을 통해 담임목사의 왕성한 활동상을 볼 수 있으니 자긍심이 높아지고, 담임목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생생한 현장스케치와 열정이 깃들어 있는 글을 매주 주보에 직접 게재한다. 그리고 얼마나 지독하게 신문을 읽어대는지 모른다. 마치 진공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듯이 활자를 삼킨다. 밥 먹는 짬을 내서도, 전라도 집회를 마치고 부산에 넘어오는 그 새벽 장거리에도 몇 시간씩 차 속에서 활자를 음미했다. 이렇게 공들인 그의 입력(in put)은 벌써 10여 권의 베스트셀러로 출력(out put)됐다. “신문 누가 보느냐?”는 시대에 그는 종이신문을 걸신들린 듯 탐독했고, 그의 글은 최고봉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한마디로 <미쳐야 산다. 끝까지 간다.>의 글자 그대로의 모습이다. 언어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그의 주일설교는 유트브에서 수천, 수만의 조회수로 상위를 점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