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선물
2025. 2. 6. 목요일
운아당,
아버지가 너의 이름을 내게 준 지 어느덧 13년이 지났구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너를 갑자기 흔들어 깨웠을 때, 놀라지 않았니?
마치 세상에 처음 나온 것처럼, 낯설지?
사실 나 역시 아직 너를 나라고 하기엔 조금 어색해.
우리의 첫 만남, 나는 또렷이 기억해.
2012년 8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이었어.
오랜 세월 척추 협착증으로 고생하신 아버지는
그날따라 평소와는 조금 다른 얼굴로 말씀하셨어.
“이제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가야겠다.”
그 말의 뜻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을 똑바로 바라볼 용기가 없었어.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던 나는
뜻밖에도 이런 말을 꺼내고 말았지.
“아버지, 그동안 읽으신 책과 삶의 지혜를 저에게 주세요.”
늘 병상에서도 안경을 쓰고 책을 읽던 아버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어.
“그래, 다 가져가라.”
그 대답은 너무 간단해서, 순간 당황스러웠어.
재산을 달라는 게 아니니 가볍게 주시는건가,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의 가장 귀한 유산이었을지 몰라.
'생각해 볼게. 너거 오빠 오면 물어보고'라고 답할 줄 알았거든.
딸인 나에게 쉽게 대답을 해준 것이, 조금 의외였어.
하지만 내가 바랐던 건
단순한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었어.
어쩌면, 인정받고 싶었던 거야.
아버지의 격려와 사랑, 따뜻한 말 한마디를 바랐는지도 몰라.
그래서 다시 말했어.
“아버지의 인생을 글로 남기고 싶어요.”
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시더니,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말씀하셨어.
“안 할란다. 과거는 되짚어 뭐 할기고? 그저 잘못한 것만 남을 텐데, 하기 싫다.”
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어.
그래서 다시 조심스레 청했어.
“그럼, 유산으로 호 하나만 지어주세요. 제가 글을 쓸 때 필명으로 쓰고 싶어요.”
잠시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하시던 아버지는 이윽고 말씀하셨어.
“그래, 생각해 둘게. 내일 와라.”
나는 속으로 ‘가스나가 무슨 필명이 필요하노’ 하실 줄 알았기에,
그 대답은 의외였고 또 놀라웠어.
다음 날, 아버지는 정성껏 써 주신 ‘운아당(芸芽堂)’이라는 이름을
해석과 함께 봉투에 곱게 접어 주셨어.
‘운(芸)’은 향기롭다는 뜻,
‘아(芽)’는 새싹을 의미하지.
“향기로운 새싹의 집.”
아버지는 그 뜻을 이렇게 적어주셨어.
“산수풀 울울창창한 선비의 집,
갈천 선조를 우러러 사모하는 운아당.”
그 ‘운(芸)’ 자는 우리 선조, 갈천 임훈 선생의 동생이었던 첨모당 임운 선생의 이름에서 따오신 거라고.
하지만 나는 너의 이름을 쉽게 부르지 못했어.
어릴 적 아버지는 아들만 바라보셨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 딸들을 ‘이 놈의 가시나’라며 부르셨거든.
여자로서 무시당한다는 생각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이렇게 귀한 이름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선조를 사모하는 이름이라는 점도
감당하기엔 너무 무겁게 느껴졌어.
내가 그 이름을 쓸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아버지께 그 의미를 더 묻지 못한 것이 지금도 아쉬워.
아버지는 그로부터 한 달 후, 2012년 9월 1일,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어.
그리고 너만이 내게 남았지.
운아당,
아버지가 떠난 지 벌써 13년이 흘렀어.
이제는 너와 좀 더 가까워지고 싶어.
그래서 너의 이름으로 일기장을 열었어.
‘역행자 운아당 일기’라고.
‘역행자’는 자청 작가의 책에서 따온 말이야.
우리는 종종 고정된 생각과 습관에 갇혀 같은 삶을 반복하지.
그 책은,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 '고정된 습관을 역행하라'고 말해주었어.
나도 지금의 나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여태까지 틀 속에 갇혀 살아온 나를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하는,
진짜 나를 다시 만나고 싶었거든.
그래서 너와 함께하는 떠나는 30일간의 일상을 시작했어.
나에게로 떠나는 첫 여행이야.
운아당,
우리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자.
아버지께 직접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지만,
너와 만나게 해주신 것만은 진심으로 감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