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 위의 카이로스(Kairos)

때가 되어야 들리는 말들

by 박보라

어떤 배움은 단숨에 깨달음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배움은 지독하리만큼 긴 잠복기를 거친다. 선생은 수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제자는 매번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진짜 이해는 때로 1년이 넘는 시차를 두고 도착하곤 한다. 어제의 벤치 위에서 나는 1년을 돌고 돌아 도착한 배움을 만나게 됐다.


어제 인클라인 벤치 프레스를 하던 중, 1년 넘게 나를 지도해 온 선생님이 내 발의 위치를 고쳐 잡아 주었다. 지면을 지탱하는 다리의 각도, 발바닥이 바닥을 밀어내는 힘의 방향. 그가 일러준 대로 발을 위치시키자 마법처럼 몸이 고정되었다. 전에는 무게가 올라가면 발이 미끄러지듯 밀리곤 했는데, 어제는 마치 바닥과 내가 하나가 된 듯 단단했다.


"신기해요! 발이 하나도 안 밀려요!"

내가 아이처럼 신기해 하자, 선생님이 대답했다.

"이거 제가 1년 동안 계속 말했던 거예요. 제가 이렇게 계속 발 위치 잡아드린 것, 기억나시죠?"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정말이지 어제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바벨을 잡을 때마다 똑같은 문장을 내 곁에 던져두고 있었다. 왜 그 언어는 1년 동안 허공을 맴돌다 어제서야 비로소 내 발바닥에 도착한 것일까.


아마도 지식의 카이로스(Kairos)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어에는 흐르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운명적인 찰나를 뜻하는 '카이로스'가 있다. 지난 1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었다. 늘 내 주변을 비처럼 적시고 있었던 말. 내 몸과 정신이 그걸 받아들일 준비가 된 '카이로스의 순간'은 바로 어제였던 것이다. 지식은 가르치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의 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또, 이건 몸의 암묵지(Tacit Knowledge)가 가진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철학자 마이클 폴라니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말로 들은 걸 곧바로 몸으로 알지는 못한다. '다리에 힘을 주라'는 선생님의 언어는 1년 동안 내 뇌 어딘가에 데이터로 쌓여 있었을 뿐, 나의 감각은 아니었다. 어제 그 각도를 찾은 순간, 방치되었던 언어가 깨어난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지식을 가로막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나의 생존 본능이었다. 운동 초보 시절, 내 뇌의 최우선 과제는 무거운 바벨에 깔리지 않아야 한다는 공포와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었다. 생존이 급급할 때 뇌는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당장 필요 없는 정보는 노이즈로 처리해버린다. 가슴 근육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발과 다리의 각도 같은 섬세한 정보는 차단해버린 것이다. 이제 바벨의 무게가 더 이상 공포가 아니게 된 지금. 나의 감각은 비로소 효율적인 움직임을 위한 정보를 수신하기 시작한 걸까.


이 과정을 묵묵히 지켜봐 준 선생님을 보며 선생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 정의해본다. 나 역시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로서, 똑같은 공식을 수백 번 반복하며 벽에 대고 말하는 듯한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다. 선생이란, 학생이 지금 당장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찾아올 그 '카이로스의 순간'을 위해 지치지 않고 씨앗을 뿌려두는 사람이다. 학생의 그릇이 바로 세워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인클라인 벤치 프레스를 하다가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 이어진 플랫 벤치에서는 평소 들던 무게조차 제대로 밀어내지 못했다. 보조를 받아 겨우 마지막 남은 힘까지 바닥을 긁어 썼다. 숫자로만 보자면 오늘의 기록은 초라한 패배였다.


하지만 헬스장 문을 나서는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오늘 하루, 무게는 잃었지만 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지지대의 본질을 얻었다. 1년 전부터 내 곁을 맴돌던 목소리가 마침내 운동이란 토양에 뿌리를 내린 날. 1년의 시차를 두고 도착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붙잡으며 생각한다. 배움이란 결국 나를 짓누르는 무게를 견디는 법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바닥을 믿는 법이라는 것을. 그 믿음이 내일의 바벨을 다시 마주할 용기가 되지 않을까.


https://www.youtube.com/@heavy.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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