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태치먼트(Detachment) -누군가의 생존 방식-

by Hong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득히 먼 거리에 놓인 행복을 바라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절망을 공유하는 것이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고, 그것을 즐기게 되었다. 해피엔딩보다는 새드엔딩. 작위적 웃음보다는 보고 나면 같이 울 수 있는 그런 것들 말이다.

디태치먼트를 보게 된 계기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예의상으로라도 집어넣을법한 유머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색으로 비유하자면 빛 조차 흡수하는 벤타블랙, 상실감이 스크린을 뚫고 나오는 그런 이야기. 절망을 관통하는 치유법.


본 작품에서 내가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크게 두 가지. 인간의 한 생존 방식과 교육제도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여기서는 생존 방식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별 다른 이유는 없다. 두 가지 다쓰다 보니 길어지는 것도 있고, 생존 방식에 대한 고찰이 더 재미있었으니까.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며 시작해보자. 주인공 헨리가 인터뷰 준비를 하며 다음과 같은 대사를 잇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라면, 있을 필요가 없다.


첫인상으로 강박증 환자 혹은 유난을 떠는 인물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뒤이어 작품을 계속 감상하다 보면 헨리가 그런 인물이라기보다는 그저 두꺼운 방어벽을 치고 살아가는 인간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정착이라는 것과는 동떨어진 인물. 정교사가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며 아이들과 친해질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임시교사라는 그의 직업이 천직처럼 생각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정착과 동떨어지게 된 것일까? 궁금하지만 단서가 남은 것은 그의 가정사뿐이다.


작중 헨리가 할아버지라 부르는 인물의 임종 직전 헨리는 그를 다시 아버지라 부른다. 뒤이어 에리카에게 해주는 가정사 이야기까지 참고해보면 헨리가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아이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 자체로도 인륜을 거스르는 중대한 사건이긴 하지만, 작품 속에서 더욱 중요해 보이는 사건은 그가 어린 나이에 엄마가 죽었으며 그것을 실제로 목격했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가 아버지와 어떠한 삶을 보내왔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허나 브로디 그 특유의 공허한 눈빛과 함께 일관된 무관심으로 무장한 헨리를 보면 적어도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가 상실감으로 인생을 가득 채웠다는 것과 현재 어떤 삶을 선택하고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자신의 안에 그 무엇도 두지 않는다면, 그 무엇으로부터도 상처받을 일이 없으므로 그는 어떤 것도 지나치게 가까이 두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그가 자주 뱉는 말마따나 비어있는 인물이다.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허나 이론상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그의 방벽에도 구멍이 난다. 총 두 개의 구멍이 뚫리게 되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이 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에 의해 생성된 것이다.


헨리의 재미난 점은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듯 보이지만, 끝끝내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 역시 드러낸다는 것이다. 작중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는 엄마와 함께 지냈던 추억의 파편들을 살펴보면, 현재에는 멸종한 듯 보이는 헨리의 웃음이 그 추억 속에는 지천에 널려있다는 것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엄마와 장난치며 웃는 유년시절의 미소. 아마도 그가 놓지 못한 희망은 바로 그 시절 잠시나마 느껴봤던 행복이 아닐까.

곧 엄마와의 과거를 떠올리며 그가 타인과의 관계 그 너머에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완벽한 거리두기와는 상반된 모습을 몇 번씩 드러내는데, 대표적 장면이 바로 가출 청소년 에리카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버스에서 매춘 행위를 하고, 초면에 육두문자를 내뱉는 에리카를 헨리는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먹여주고, 재워주고, 간호해준다. 그가 선생이다보니 어떠한 직업 윤리에 이끌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청소년에게만은 특별 대우를 해준 것일 수도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그가 지향한 '거리두기' 와는 상반된 행위였음은 분명하다. 절대적이라 여겼던 신념의 뒤틀림. 곧 스스로가 만들어 낸 구멍인 것이다.


또 하나의 구멍을 낸 것은 메레디스이다. 그녀는 헨리가 예상치 못한 시기에,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와의 거리를 좁히려고 시도한 것이다. 가족을 포함해 모든 이들로부터 자신의 취미는 물론 외모에 대해서도 비난만 받으며 살아온 그녀에게 헨리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허나 그 마음의 전달은 서투르고 급작스러웠다. 유일한 빛을 찾아 날아온 그 어린 학생을 어찌 비난할 수 있겠느냐만은, 헨리 입장에서 보았을 때 자신의 방벽이 뚫린 것에 당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때문에 그 당황은 그가 다시 냉정함을 되찾게 만들었고, 그것이 자신의 방벽에 구멍을 낸 두 인물 에리카와 메레디스로부터 다시 멀어지는 선택을 하는 것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렇게 메레디스와는 임시교사 그 이상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에리카는 보호소로 보냈다.


메레디스가 헨리로부터 어떤 사랑을 바랐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중요하진 않다.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잘 될 거야'라는 한 마디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녀는 헨리가 그 말을 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을 것이다. '비어있는' 듯한 헨리의 눈빛, 말투, 행동들에 동질감을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착각이었다.

헨리 그 스스로도 자신을 텅 비어있는 인간이라고 지칭하지만, 비어있다는 것이 꼭 들어와도 좋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기조차 비워져 있다면 그곳은 인간이 살 수 없는 공간이 될 테니까. 때문에 그는 누구도 자신의 안에 받아들일 수 없었고, 잘 될 거라는 그 간단한 한 마디조차 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메레디스는 자살한다. 빛이라 믿었던 사람에게까지 버림을 받았으니, 살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헨리가 그녀의 자살에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허나 그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애초에 그는 누구에게도 출입을 허락한 적이 없었으니까. 엄연히 따지면 메레디스의 무단침입에 불과했던 것이다.

허나 무단이라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메레디스가 자신이 방벽 안으로 침입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신념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인데, 암만 자신이 노력할 지라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언제든 타인에 의해 방벽이 부서질 수 있다는 약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말에 이르러 헨리는 보호소에 있는 에리카를 찾아간다. 자신이 밀어냈던 것을 다시 찾아간 것이다. 그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거리두기'를 포기하지 않았거나, 포기했거나.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가설은 조금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에레카를 다시 찾아갔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메레디스의 죽음에 방벽을 더욱 강화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못해 에리카를 찾아갔다고 봐야하는데... 그렇다면 헨리는 매우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결론이 난다. 신빙성도 떨어지고 믿기도 싫어지지만...그럼에도 이 가설을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것은 헨리가 스스로를 인간이 아니라고 표현하기도 했으니까...

반면 만약 포기했다고 한다면,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벽이 없어진 공간에는 많은 것들이 드나들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굳이 둘 중 하나라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다. 둘 다 아닐 수도 있으며, 반대로 둘 다 선택했을 수도 있으므로.


그에게 있어 삶이란 스스로를 보호하고 무뎌지는 것과 싸우기 위해 배우는 것이니까.

Doublethink

그것을 위해서는 서로 반대되는 신념도 동시에 얼마든지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