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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돌 Jul 18. 2024

접촉의 한계와 접속의 가능성

위르실라 메이에의 <라인>(2023)을 중심으로

 <라인>은 접촉의 가능성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어머니 크리스티나를 폭행한 장녀 마가렛은 신체적 접촉에 가장 취약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접촉이 아닌 접속을 위한 매개체이다. 누군가 성난 그녀를 말리려 몸을 잡는다거나, 그녀가 서툴고 거친 언어로 또는 음악으로 타인과 접속하려는 시도를 거부당할 때 그녀는 쉽게 폭발한다. 폭발은 자연스레 주변인들에게 전이되고 그녀는 물리적인 접촉으로 제압당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법원이 선고한 집으로부터 반경 100미터 접근금지명령은 마가렛에게 대화의 여지, 즉 접속의 가능성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때로는 접촉이 제한될 때 접속의 가능성이 마련된다.

 그렇다면 다른 인물들은 마가렛처럼 폭발할 줄 모르는 걸까. 다른 인물들은 접촉을 믿는 편에 가깝다. 그들이 믿는 접촉의 가능성이란 그들에게는 어떤 믿음과 같은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오래 묵은 밧줄과 같다. 크리스티나와 애인 에르베, 루이즈와 쌍둥이 딸, 마리옹과 소꿉친구는 모두 각각의 관계에서 접촉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애인과의 스킨십, 쌍둥이에게 젖을 물리는 행위, 낯설고 서툰 손가락의 접촉 등을 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크리스티나, 루이즈, 마리옹이 모두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들을 대놓고 떨어트려 놓는다. 카메라가 바라본 그들은 전혀 접촉하지 못하고 있다. <라인>이라는 정직한 제목에는 어울리지 않는 점들의 형상만이 담긴 풍경은 감히 우리가 이어져있던 순간이 세 자매가 크리스티나의 뱃속에 있었던 순간뿐임을 일깨운다. 그들은 애초에 선이 아닌 점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접촉이 없는 이 세계에 접속의 가능성이 드리는 순간들이 있다. 접근금지명령이 시행되던 순간 그들은 강제적으로 접촉하지 않을 수 있으며, 각자의 매개체를 찾거나 발견해 나간다. 기타와 앰프가 들어오거나,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거나, 담담히 두려움을 고백할 수 있는 스테이지를 다시 찾거나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은 접속의 가능성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세 자매를 위해 피아니스트의 삶을 포기하고 피아노 강사로 살아온 크리스티나가 마가렛의 폭행 때문에 한쪽 귀 청력을 잃은 시점이다. 마가렛이 분노를 재우고 접속을 갈망할 때 다른 시점에서 크리스티나는 분노를 그녀만의 정확한 언어로 다시 다듬는다.

 정확한 분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섬세한 장면으로 나타난다. 마가렛 없는 성탄절에 마리옹이 선물한 티셔츠를 입은 에르베의 옷 속으로 크리스티나가 들어간다. 조금 과해 보이는 크리스티나의 스킨십을 말리는 루이즈에게 크리스티나가 외치는 ‘너도 나를 칠 거냐’는 말이 품은 분노의 규모는 마가렛이 뱉는 분노의 규모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신체적 접촉이 마가렛에게 분노를 유발한다면, 균형이 깨진 채로 들리는 세계의 소리가 크리스티나의 분노를 유발하는 원인이다. 마가렛의 분노가 줄어드는 시간에 크리스티나의 분노가 더욱 정교해지는 이 시점은 가족공동체의 가족주의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다. 선의 세계에서 보이는 것은 점들일 뿐이고 가족주의의 세계에서 보이는 것 또한 탯줄이 잘린 채 세계의 좌표에 위치한 개인들일뿐이다. 이 세계에서 접촉은 명확한 한계가 있다. 우리는 아무도 이어져 있지 않고 떨어져 있는 존재라는 것이 <라인>의 차고 시린 진단이다.

 <라인>의 가족주의에 대한 진단은 냉소적이지만 그래서 가능성이 마련된다. 잘린 탯줄을 근거로 우리가 떨어져 있기에 우리가 접속할 수는 있다는 것. 그러나 영화는 그렇게 평안하게 끝나지 않는다. 크리스티나와 마가렛이 함께 부엌에 서 있는 짧은 시간에 카메라는 유연하게 움직인다. 잠시 둘이 화면에 겹쳐 보이지만 카메라가 이동하는 순간 둘은 어떠한 접점도 없이 떨어져 있다. <라인>이 말하는 제목 ‘선’은 둘의 접속의 가능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둘 사이를 정확하게 갈라놓는 어떤 선을 뜻하기도 한다. 접촉의 한계와 접속의 가능성은 다시 접촉의 한계를 불러낸다. 정확한 진단은 때로 시리기도 하지만 <라인>의 진단이 누군가를 시리게 한다면, 그리고 그 분절된 각각의 관계를 생생하게 바라보게 만든다면 그건 우리가 접촉했던 시간들이 일상에서 신화처럼 우리에게 기능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라인>에 모녀의 관계가 툭 끊기는 순간이 넘실대듯 삶에서도 접촉의 사기극은 넘실댄다. 우리는 사기극에 속을 의무가 없다. 때로는 그 의무가 당연하게 느껴지더라도. 가족주의라는 사기극을 끊어낼 선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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