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얼룩에 대하여>

by 선경





느낌

이성복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필 때

느낌은 그렇게 오는가

꽃나무에 처음 꽃이 질 때

느낌은 그렇게 지는가


종이 위에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은 흔적이 있다


- 이성복 시집 <그 여름의 끝>에서 인용







하루가 저물고 졸음에 항복하는 순간, 생이 선사한 최고의 선물임에 분명한 그 순간을 환대하며 기꺼이 잠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이의 하루는 분명 만족스러웠겠지. 그 하루를 일생으로 비유해도 이 진실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요즈음 이 진실이 두려운 나. 그래서 묻는다. 기꺼이 졸음에 승복할 수 있는 하루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그러한 생의 비결은 무엇일까? 고통이나 불편함이나 증오라곤 없이 안락함과 쾌락과 사랑만으로 점철되어서? 그럴 리 없다.


얼룩.

쓸쓸한 밤, 누군가와 도란도란 나누고픈 그날의 얼룩진 마음이 있다. 하지만 내일의 노동이 기다리는 소중한 이들의 밤을 방해할 수 없기에, 혹은 그렇게 소통되기엔 너무나 모호한 느낌에 관한 것이라 마땅한 언어를 서둘러 찾을 수 없기에, 서둘러 찾기보다 진득하게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은 예감에... 전화기 보다 컴퓨터를 켜고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아득한 여정의 한 발을 용기 있게 딛기로 한다.


더듬더듬 얼룩을 쓰다듬으며 놓치고 싶지 않은 느낌의 손을 부여잡고 한 문장 한 문장 낯선 길을 찾아들어가는 밤. 그런 밤은 기꺼이 잠들 수 있었다. 어쩌면... 진짜 하루, 하루의 '실재'는 사태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길어 올리는 의미에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충직한 관객이 되어 사태의 곁을 진득하게 서성거리며 의미를 명명하려 더듬거리는 일. 얼룩을 이해하는 일, 느낌을 기록하는 일.


나는 영원을 모른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감히 영원에 동참하고자 야망에 들뜬 적도 있었다. 영원에 동승할 수 있는 티켓은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그 자격이나 가격은 무엇인지 세간의 소문에 기댄 적도 있었다. 혈기쇠잔해 가는 지금, 셀 수도 없는 많은 하루들을 건너서 이제 상실의 불안에 짓눌려 쉬 잠들지 못하는 밤들 앞에 내가 있다. 그런 밤엔 어떤 구원을 꿈꾼다.


내가 꾸는 구원의 꿈은 이런 것이다. 영원은 찰나 속에 있다. 덧없고, 연약하며, 쉬 부서지고 쉬 휘발되어 버리는... 그저 얼룩을 남길뿐인... 그러니 영원에 동참하기 위해서 찰나의 흔적인 얼룩의 진언에 귀 기울이고 명상하고 그 소박함을 경배하라. 그 대가는 생의 추억으로 가득한 영혼이 맞이하는 평온한 잠이다.


...

내 소망이 있다면 생을 끌어안는 것이다. 이 소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만한 이들은 다 알 것이다. 불가능한 꿈일지라도 너무 늦기 전에, 내게 남겨진 유일한 행복의 길이 그것임을 알기에 그 여정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 연재는 기꺼이 잠을 환대하고자 하는 소망으로 시작하는 얼룩에 대한 이야기의 기록이다. 얼마 전에 경험한 하루 드로잉의 매력에 힘입어 얼룩얼룩 그리고 더듬더듬 말을 더하고 싶다. 이 기록이 나와 같은 소망을 품은 이들의 하루에 희미한 얼룩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감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