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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보퓨레 May 23. 2022

오늘의 나는 제대로 비워졌을까?

테라코타가 불에서 견딜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건

<손>, 1963(사후제작), 청동


언젠가의 나는 남들에게 속이 꽉 찬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했다. 좋은 대학, 좋은 회사, 깔끔한 외모에 말도 조리 있게 잘하는 그런 사람. 거기에 언제나 철저한 준비성 정도를 더하는 이미지쯤이었을까. 학창 시절까지는 그런 모습의 내가 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과제나 발표는 미리미리 준비하고 시험공부도 부지런히 하면 어느새 속이 꽉 찬 사람 비스름한 존재는 될 수 있었다.


<나부>, 1954, 석고


이상하게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꽉 찬 사람이고 싶은 욕심은 오히려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완벽주의 코스프레 중인 나는 밀려드는 일의 파도에 몸을 가누지 못해 심해 같은 밤을 맞이하기 일쑤였다. 그런 미숙함에 대한 선배들의 조언 혹은 비판도 이어졌는데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던 나에게 더 아프게 다가왔다.


<지원의 얼굴>, 1967, 테라코타


강원도의 한 갤러리에서 테라코타 작품을 만났었다. 테라코타는 흙으로 모양을 잡고 불에 구워 만드는 조소 작품이라는 관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질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투박한 조소 작품을 보고 있었고, 이내 강렬한 무언가가 전해져왔다. 작품들이 지니고 있던 에너지가 어디서 왔는지 궁금해진 나는 작품을 집에 들여 퇴근 후 가끔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테라코타는 안을 텅 비워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가마에서 구울 때 높은 온도에 터져버리고 갈라진다고 한다. 속을 비운 점토만이 고온의 불을 견뎌내 멋진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다.


<휴식>, 1967, 테라코타


시간이 지나 어느덧 직장 생활 8년 차, 나 또한 스스로를 비우는 법을 깨우치고 있다. 많은 일이 밀려와도 머릿속 뒷마당에 펼쳐놓고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게 됐다. 높은 밀도로 인해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던 마음도 예전과는 다르게 허허 웃으며 흘려보낼 수 있는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그 옛날 눈빛에 총기가 없다는 한 마디에도 그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괜스레 웃음이니 나기도 한다. 가득 채웠었기에 비울 수도 있는 법이겠지.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 나는 비워졌는가. 나는 불을 견디고 멋진 작품이 될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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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역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가 5월 22일 일요일까지 열립니다. 작가의 아틀리에 를 본떠 기획한 'ㅇ'(우물)과 'ㄷ'(가마) 모양의 전시 공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 총 141점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평일 관람시간은 10시에서 20시, 토요일과 공휴일은 10시에서 19시입니다. 월요일은 휴관이며 입장은 무료입니다.

(*전시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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