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으면 안정적이기도 하고 처음에 잘 못해도 티가 잘 안 나서 천천히 배워갈려구요."
"다들 그렇게 시작해.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삼 년 보고 나서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하지. 그런데 있잖아? 실제로 그렇게 되는 꼴을 보질 못했어."
"정말요?"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거든. 처음엔 나도 정말 짜증 그 자체였어. 선배들보다 훨씬 많이 움직여야 되는데, 말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그러고 있다가 슬며시 나도 젖어들더라고. 전신마취 해봤나? 팔에서부터 마비가 스멀스멀 올라오는데 머리는 살아 있거든. 와 이게 마취야? 하지만 내 정신은 아직 살아있으니 신기하지. 하지만 이내 곧 정신까지 마취가 돼버려. 그 후론 끝이지 뭐."
"저는 그래서 지금 드는 생각들을 다 일기로 적어두고 있어요. 나중에 발언권이 생기면 얘기할려구요."
"그럴 것 같지? 지금은 어깨가 많이 무거울 거야. 하지만 곧 알게 돼. 나눠서 드는 판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다는 걸 말이지."
"제가 지금 선배 무게까지 짊어지고 있는데도요?"
"당장은 무게 그 자체가 신경 쓰이겠지만, 생각해 봐. 네가 쓰러져도 철판에 짜부돼 죽는 일은 없잖아? 바로 그걸 얘기하는 거야."
"이 정도까지 문제를 아시면, 당장 뛰쳐나가야 하는 거 아닐까요?"
"나도 내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럴 수 있는데 안 하는 거라고 묘한 자위를 하고 있었지. 그런데 있잖아."
"그런데 뭐요?"
"어느 날 서로 갖겠다던 머리가 판 너머 저 바닥에 툭 떨어지더라고. 생각으로는 어라, 당장 철판을 팽개치고 머리를 가지러 가야겠다 싶었는데. 도무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어.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가 않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