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 너는 왜 나를

'고양이는 나를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합니다' (6)

by 이명주

“넌 나를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해(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 1997)'의 아름다운 대사다. 누군가, 고양이가 내게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똑같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고양이는 나를 더 좋은 사람이고 싶게 합니다. 더 다정하고 더 부지런하고 더 용기있는 그런.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이었다면 그건 많은 부분 고양이 덕분"이라고.


2009년 생애 첫 고양이 가족 '양양'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지난 11년간 한가족이 된 고양이가 여럿, 반면 당시는 앞날을 몰라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했지만 결국 진짜 가족을 찾는 여정을 함께 한 고양이도 여럿, 그리고 한참을 지나 생각해도 여전히 아찔한 생사의 순간을 함께 한 고양이도 여럿이다.


그렇게 나의 과거와 현재에, 또 미래 언제 어디서 기적처럼 동화처럼 만나 함께 할 내 생에 모든 고양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는 말하는 토끼를 만남으로써 이상한 나라에 발을 들이게 된다. 살면서 가끔 나도 그런 이상한 세계와 연결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 봄밤, 내 집 앞을 지나는 길고양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는데 왠지 야릇한 끌림을 느끼는 찰나에 녀석이 마치 내 마음을 읽은냥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 그날도 그랬다.


'놈'을 처음 만난 건 정확히 지난달 30일, 내 집 들어오는 계단 앞에서였다. 함께 있던 그의 동료가 자리를 뜨는데도 그는 나를 쳐다보며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부드러운 듯 또렷한 이목구비. 제법 오동통한 몸매지만 절대 둔해 보이진 않는, 전체적으로 호감형이었다.


'뭐지?' 하는 의아함과 동시에 그를 부르고 싶은 욕구. 이름을 몰라 눈짓과 손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랬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자리에 앉았다. 아기 사자 같은 귀여운 목소리. 조심스레 뻗은 손끝에 닿는 그의 털은 보드랍고 따뜻했다. (연노랑 털에 아기 사자 같은 울음 소리 때문에 이름을 '연호'라 지었다)


우리는 계단에 나란히 앉았다. 더욱 용기를 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지긋이 몸을 기댔다. 내려다 뵈는 작고 동그란 정수리가 사랑스러웠다. 잠시 후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왔고 다시 나갔을 땐 한동안 혼자 앉아 있던 그가 가고 없었다.


2015년 5월 길고양이 연호와의 첫 만남에 관해 써둔 글이다. 마치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상대와의 짧고도 황홀했던 데이트 기록 같은. 그렇게 미묘한 여운을 남기고 헤어진 연호가 다시 나타난 건 십여 일 뒤였다.


2.jpg 다시 찾아온 연호


집 앞 골목에서 웬 고양이가 크게도 운다 싶어 내다보니 연호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마치 허락이라도 얻은 듯 망설임이라곤 1도 없는 걸음걸이로 계단을 지나 내 집 현관문 앞까지 왔다. 그리고 맨땅에 털썩 몸을 뉘었다. 반갑기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차가운 바닥에 누운 연호가 이따금씩 내 눈치를 살폈다. 결국 나는 낮 동안만 같이 노는 건 뭐 어떨까 싶어 녀석에게 "들어와"라고 했고, 녀석은 수초 쭈볏대더니 순순히 내 말을 따랐다. 막상 한 공간에 있자 살짝 긴장한 듯한 연호. 하지만 그것도 잠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아침까지.


그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날이 밝자 연호가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대체 어디서 어찌 살다 왜 왔는지 모를 녀석은 하룻밤을 같이 잔 것이 평생 그러하기로 한 약속이라고 믿는 듯 떠날 생각을 안 했다. 나 역시 연호가 좋았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같이 살 수는 없었다. 내개는 이미 고양이 대가족이 있었기 때문.


하지만 연호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만 예쁜 짓을 했다. 아니 내 속을 빤히 알고 더 그러는 것 같았다. 아무 설명을 안 했는데도 알아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방석을 찾아 깜찍한 자세로 잠을 자고, 심지어 화장실도 한번에 찾아내 용변을 보고 나왔다.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다가와 몸을 비벼댔다.


실내에서는 물론 가까운 곳에 외출을 할라치면 냉큼 따라붙어서는 졸졸 따라다녔다. 영역동물로서 자신이 익숙한 한정된 공간을 선호하고 절제된 친밀감을 표현하는 많은 고양이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마치 고양이 가죽을 덮어쓴 개 같았다고 할까.


동네 사람들은 그런 녀석을 보며 "신기하네." "고양이는 안 저러는데." "어떻게 훈련시켰어요?" 한 마디씩 했다. 그리고 워낙 붙임성 있게 구니 당연히 연호가 나의 식구라 여겼다. 사정을 아는 앞집 중국집과 옆집 미장 가게 아저씨만이 "걔가 사람 볼 줄을 아네" 하며 웃었다.


메달냥.jpg 마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던 연호


괜스레 여지를 주어 연호가 기대를 품게 하고 결국에 마음을 힘들게 했구나 싶어 후회가 됐다. 미안했지만 그제라도 냉정해지기로 결심했다. 녀석이 어렵사리 길에서 굳혔을 단단한 마음이 더 무너지기 전에. 그렇게 아침밥을 다 먹은 연호를 억지로 떠밀다시피 해서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갔다.


하지만 연호는 순순히 떠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쫓겨난 연호가 울기 시작했다. 그것도 그냥 우는 게 아니라 목놓아 울었다. 그러다 잠시 멈춰서 이제 그만두나보다 했는데 내가 창문 앞에 서면 바로 눈이 마주치는 도로 한가운데로 나가 다시 울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며칠을 반복했다.


냉정한 척했지만 속이 타는 건 나도 마찬가지. 저러다 탈진해서 쓰러지는 건 아닌지 이따금씩 오가는 과속 차량에 치이지는 않을는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결국, 내가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단 연호에게 최대한 빨리 내가 아닌 다른 좋은 가족을 찾아주는 전제 조건을 달고.


그때부터 개인 블로그와 SNS, 가끔씩 글을 기고하는 매체에, 또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에 연호의 이야기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걸 본 SBS <TV 동물농장>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는데, 바로 그 시점에 연호를 입양하고 싶다는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마침 가까이 사는데다 그의 편지에서 한껏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리하여 며칠 후 이뤄진 삼자대면. 신기한 건 연호의 반응이었다. 그림자처럼 나만 따라다니던 녀석이 우리를 찾아온 입양 희망자를 본 순간 그와 눈을 마주치며 그 곁을 맴돌기 시작한 것. 약간의 배신감도 들었지만, 본분에 충실하기로. 불과 한 시간이 채 안 돼 나 아닌 둘의 사이는 꿀이 떨어질 듯 다정해졌다.


그렇게 연호는 새 가족을 만났고 그 집에는 이미 앞서 입양된 연호와 같은 처지였던 예쁜 길고양이 여동생도 있었다. 서로가 가까이 살고 있던 덕에 나는 그 후로 몇 년간 연호를 직접 가서 볼 수도 있었다. 어느 봄밤에 홀연히 나를 찾아와 마치 이상한 세계의 토끼처럼 나를 놀라게 또 설레게 했던 연호는 그렇게 행복하게 떠났다.


첫 만남에 꿀 떨어졌던 연호와 연호의 지금 가족 ('연호는 금사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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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의 가족을 찾기 위해 인터넷 커뮤니티에 그려서 올렸던 내 생애 첫 다섯 컷 만화.


연호의 끊질겼던 구애 당시 영상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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