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litical life story
유튜브 영상을 보는 사람도 많고, 만드는 사람도 많은 시대가 됐다. 나만 해도 평균 하루에 한 번 이상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구독’하고 있는 채널도 꽤 된다. 그리고 내 언니들 중 한 명이 유튜버다.
인기있는 유튜브 영상에는 광고가 붙는다. 광고주 입장에선 광고효과가 높은 영상에 붙어갈수록 노출빈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인기있는 영상을 찾는다. 유튜버 입장에서도 광고가 달리면 ‘수익’이 생기기 때문에 나쁠 것 없다. 문제는, 그 둘은 좋겠지만, 시청자 입장에선 성가시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시청자는 유튜브 유료서비스를 신청하기도 한다. 돈을 쓰면 광고 없이 영상을 즐길 수 있다. 말하자면,
“유전무광 무전유광”이다.
나같이 이런 데 돈 쓰고 싶지 않은 시청자는, 꼼짝 못하고 광고를 시청하게 된다. 그런데, 때로 어떤 광고는 무심코 보는 건데도 은근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끝까지 보기도 한다. 반대로, 어떤 광고는 ‘광고 건너뛰기 ▶❙’ 신호가 화면 하단에 언제쯤 뜰 것인가, 조바심치게 된다.
아주 가끔 공익광고가 붙은 유튜브 영상을 접할 때가 있다. 공익광고를 볼 때는 끝까지 봐주고 싶은 마음 반, 그만 보고 싶은 마음 반, 마음이 나뉘고 만다. 너무 대놓고 공익광고스러운 경우 웬일인지 이 내적 갈등이 더 첨예화된다. 그럴 때면 나라는 인간이 왜 이렇게 ‘공익스럽지(public interest, public good)’ 못한가 싶어, 한심한 느낌이 올라온다.
나는 이제부터, 공익과 공공성의 차이에 대하여 이야기해볼 참이다. 변명하는 건 아닌데, 변명같이 들릴 수도 있는, 변명으로 듣지 않기를 바라는, 뭐, 그렇고 그런 이야기.
‘공익’의 반대는 ‘현역’ 아니고, 사익(私益)이다. (아재개그, 패러디해봤다.)
사익은 사사로운 이익을 의미한다. 개인이나 그 개인이 속한 가족의 이익을 가리킨다. 사익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기주의자다. 이기주의자들 중엔 타인이 다칠지언정 사익추구를 절대 멈추지 않는 고집쟁이나 냉혈한도 있다.
사익추구자는 공동체의 운명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자기와 직접 관계맺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 등장하는 엄마는 ‘아들만을 위하는’ 사익추구자 엄마의 전형이다. 아, 그런 사익추구자 엄마의 역할을, 한국에서 ‘국민엄마’로 불리는 김혜자 배우가 연기했다니···.
헌데 모든 사익추구자들이 다 사익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는 건 아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추구하는데 실패만 거듭하거나 욕만 얻어듣는 사익추구자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칫 사회불만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다. 국가 차원에서 뭘 해주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는 것.
가훈이라며 따로 액자에 넣어 보관하지는 않을지라도 “손해 볼 짓 하지 마라”라든가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마라” 같은 가정교육을 은연중 받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엔 적지 않다. 손해를 안 보려면 이익을 더 잘 헤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름지기 사익추구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어쩌면 사익은 언제나 무조건 나쁜 건 아닐지 모른다. 개인의 기본적인 의식주 욕구 같은 것은 이기적으로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익추구를 하다 보면 이기적 사익추구에만 매몰되기 쉽다는 데에 있다. 세상 모든 사안을 다 사익추구의 주제로 받아들이는 것의 문제, 사익추구 편향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익을 넘어서는 것이 공익이다.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익추구자는 사익추구자보다 훌륭할 수 있다.
독일에서 나치 집권시대에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그는 군비장관을 맡았었다. 그는 독일이라는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일했다. 무기생산을 위한 효율적 산업구조를 고민했다. 슈페어는 ‘착한 나치(good Nazi)’로 자신을 적극 묘사했다. 효과가 있었다. 공익추구를 강조한 것이 주효했다. 그는 히틀러의 측근이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또 ‘U보트’로 유명한 독일 해군제독이자 히틀러가 자살 직전 후계자로 지명했던 카를 되니츠(Karl Dönitz)도 공익추구자였다. 전쟁범죄국가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그는 심지어 슈페어보다 더 낮은 형량을 받았다(10년형). 되니츠가 재판받을 때, 연합군측 장성들이 앞다퉈 그를 변호하는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군인이라면 누구나 국가를 위해, 즉 공익을 위해 전쟁을 수행하므로 그것이 정상참작되어야 한다는 이구동성!
공익은 공동체의 이익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때 말하는 공동체가 무엇인가가 중요하다. 공익추구의 사례는, 그래서 많을 수 있다. 공동체 간 이익이 상충할 때는 한 공동체의 이익추구가 다른 공동체의 피해와 손상을 구성할 수 있다. 예컨대 안중근 의사는 우리에게 있어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지만, 일본에게는 ‘반역자’다.
공공성은 공익과 같지 않다. 공공성은 공동체의 ‘이익 대 손해’의 차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칸트(E. Kant)와 아렌트(H. Arendt)에 따르면, 공공성(publicity)의 기초적 특징 중 하나는 ‘냉담하다(indifferent),’ ‘무관심하다(disinterested)’를 포함한다. 그것은 공정성을 의미하는 비부분성(impartiality)를 지향한다. 사익에 냉담, 공익에 무관심, 부분에 매이지 않음, 그것이 공공성을 특징짓는다.
공공성은 이해관계를 초월한다. 공공성은 ‘나의 사유(thinking)의 방식’과 관계가 있다. 나 혼자 사유할 것인가, 아니면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유할 것인가, 공공성은 그 지점을 가리킨다.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 따르면, 칸트는 공공성을 말할 때, 사유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를 주장했다. 칸트가 말한 정치적 자유, 그리고 공공성은 “자신의 이성을 모든 면에서 공적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칸트의 정치철학에서는 ‘언론·출판의 자유’가 ‘세상, 제일’ 중요한 것으로 된다.
공공성이 그러한 뜻이기에 사실은 누구나 공공성을 실천할 수 있다. 특정한 공인에게만 공공성의 실천이 요청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물론 공인을 유명인이나 연예인으로 한정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문제가 있다. 자유를 누리려면 책임을 이행하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공공성을 실천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목격하기가 참 쉽지 않다. 내 생각을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를 받도록 기꺼이 내어놓는 사람이 드물다는 이야기다. 내 생각의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 앞에서 우리는 주로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내 생각을 강요하거나, 반복하거나, 반발하거나, 변명하거나, 은폐하거나, 도주하거나, 삐지거나···.
최근 <정의연(정의기억연대)>의 윤미향 전 이사장 때문에 온 사회가 다소 시끄럽다. 이 시끄러움은 긍정적 방향으로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다. 이 시끄러움 속에서 사람들이 공공성을 추구한다면, 즉 “자유롭게 공개적인 검토”를 지향한다면 말이다. 언론이 그 같은 검토의 행렬에 건강하게 들어서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나는 지금 우리의 국내 언론이 이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를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있는지에 대하여,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를 해보고 싶다. 충분한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심층기사와 분석기사, 그리고 그 기사(들)에 대한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가 얼마나 이룩되어있는지에 대하여.
“자유롭게 공개적인 검토”는 책임을 전제로 한다. 책임은 ‘아님 말고’ 식으로 뱉거나, ‘아 몰라’ 식의 가짜 뉴스 퍼나르기와는 엄격히 거리를 둔다. 따라서 단 한 마디 말을 공개할지라도 그것을 공개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매우 많은 자기성찰와 심사숙고를 거쳐야 한다.
언론·출판의 자유는 바로 그와 같은 (언론·출판의) 책임과 함께 간다. 책임 없는 자유는 없다. 공공성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이익 여부가 아니라) 개인의 사유방식과 의견발표에 대한 자유와 책임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룬다.